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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46063457 / 408쪽 154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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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앤루니스 리뷰
그들의 죽음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이른바 보수의 집권 속에 노래도 빼앗기고 의미마저 희석되다 못해 오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광주’는 뒤로만 향해 가는 한국 민주주의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일상의 용어가 되고 희망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춘 부끄러운 나라 대한민국은, 그러나 지난겨울 평범한 일상을 갈망하는 국민의 염원으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숱하게 뿌려진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 위를 평화롭게 거닐어, 지난했지만 가슴 벅찬 역사를 우리는 써 내려갔다. 4·19 혁명의 토대 위에 5·18 광주민주항쟁의 비극을 양분 삼아 1987년 유월항쟁, 2017년 우리만의 혁명을 이루어낸 것이다. 국민을 고문하고 억압하던 독재국가는 어떻게 무혈의 민주적인 절차로 명예로운 혁명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약자에게는 따뜻하게, 강자에게는 엄하게’를 되새기며, 광주의 진실을 쫓고 있는 광주MBC의 기자 김철원은 이 질문의 답을 찾아, 오월도 광주도 잊은 10인의 인물을 추적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불의에 맞섰던 열흘간의 광주항쟁은 군대의 총칼에 무참히 진압되어, 침묵과 망각 속에 봉인된 듯 보였다. 그러나 광주를 기억하고 부채감에 괴로워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은 광주를 되살려 유월항쟁으로, 2017년 촛불로 부활했다.
이 책은 ‘그날의 광주’가 아닌, 광주 이후 그날의 광주를 알리고자 목숨을 던진 청춘들의 숭고한 삶의 기록이다.
출판사 리뷰
그들의 죽음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이른바 보수의 집권 속에 노래도 빼앗기고 의미마저 희석되다 못해 오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광주’는 뒤로만 향해 가는 한국 민주주의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일상의 용어가 되고 희망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춘 부끄러운 나라 대한민국은, 그러나 지난겨울 평범한 일상을 갈망하는 국민의 염원으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숱하게 뿌려진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 위를 평화롭게 거닐어, 지난했지만 가슴 벅찬 역사를 우리는 써 내려갔다. 4·19 혁명의 토대 위에 5·18 광주민주항쟁... 그들의 죽음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이른바 보수의 집권 속에 노래도 빼앗기고 의미마저 희석되다 못해 오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광주’는 뒤로만 향해 가는 한국 민주주의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일상의 용어가 되고 희망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춘 부끄러운 나라 대한민국은, 그러나 지난겨울 평범한 일상을 갈망하는 국민의 염원으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숱하게 뿌려진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 위를 평화롭게 거닐어, 지난했지만 가슴 벅찬 역사를 우리는 써 내려갔다. 4·19 혁명의 토대 위에 5·18 광주민주항쟁의 비극을 양분 삼아 1987년 유월항쟁, 2017년 우리만의 혁명을 이루어낸 것이다. 국민을 고문하고 억압하던 독재국가는 어떻게 무혈의 민주적인 절차로 명예로운 혁명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약자에게는 따뜻하게, 강자에게는 엄하게’를 되새기며, 광주의 진실을 쫓고 있는 광주MBC의 기자 김철원은 이 질문의 답을 찾아, 오월도 광주도 잊은 10인의 인물을 추적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불의에 맞섰던 열흘간의 광주항쟁은 군대의 총칼에 무참히 진압되어, 침묵과 망각 속에 봉인된 듯 보였다. 그러나 광주를 기억하고 부채감에 괴로워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은 광주를 되살려 유월항쟁으로, 2017년 촛불로 부활했다. 이 책은 ‘그날의 광주’가 아닌, 광주 이후 그날의 광주를 알리고자 목숨을 던진 청춘들의 숭고한 삶의 기록이다. 국민을 고문하며 억압하던 독재국가는 어떻게 민주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는가 그동안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한 주제는 ‘경제성장’이었다. 비록 압축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없진 않았지만, 한국의 성장 신화는 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는가?” 그랬던 세계인들은 이제 한국인들이 일궈낸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있다. 촛불혁명이 만들어낸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평화로운 정권 교체 과정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지금도 진행형인 2017년 한국의 민주혁명은 ‘한강의 기적’을 뛰어넘는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1600만 국민이 거리로 나와 민주적 절차로 권력을 교체한 사례는 전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혈혁명, 명예혁명, 촛불혁명 그 어떤 다양한 표현으로도 설명하기 부족한 위대한 성과였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처럼 한국의 민주주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을 딛고 한 걸음씩 전진해왔다. 이 책의 저자 또한 분신과 투신이라는 자기희생의 방법으로 광주학살을 알린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언론조차 외면한 금기의 단어 ‘광주’를 목청껏 외치며 한국 민주주의의 길에 ‘희생’이라는 단어로 아로새겨진 그들은 누구인가? 침묵과 망각 속에 봉인된 광주를 되살리다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산화한 10인의 순교자들 언론이 신군부의 서슬에 굴해 광주를 폭도들이 가득한 폭동의 도시로 표현하며 진실을 호도할 때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광주를 알리다가 죽음마저 은폐된 김의기,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풀포기 같은 삶을 불사른 김종태,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세 번의 외침 후에 계단을 피로 적신 김태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희생으로 승화시킨 홍기일, 전태일과 같은 궤적을 걸어 광주학살을 알리고 불꽃이 된 송광영, 신군부를 찬양하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전두환 처단을 외치다가 혹독한 고문 끝에 숨져간 장이기, 광주를 외면하고 신군부에 동조한 미국을 규탄하며 케로신을 끼얹고 산화해간 표정두, 불길 속에서도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친 부산의 황보영국,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이기를 노래했으나 군부정권의 연장을 한탄하며 자신을 불태운 박래전, 유월항쟁이 퇴색되고 올림픽의 환희 속에 죄상이 희석되는 현실에 분노하며 몸을 던진 김병구. 저자는 신군부의 치 떨리는 당당함 앞에 평범한 일상을 꿈꿀 수 없었던 젊은이들의 삶을 그들의 글과 살아온 행적, 당시 보도된 기사,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추모글, 고은 선생의 시, 젊음 속에 멈춰버린 사진으로 구성해 그들의 죽음을 조명했다. 더 나은 사회를 갈구하며 누구보다 차갑게 현실을 바라봤고, 누구보다 따뜻하게 사람을 사랑했던 이들 열 사람의 용기 있는 선택은 6월항쟁의 불씨가 되고, 2017년에는 촛불이 되어 현재를 밝히고 있다. 되찾은 노래 속에 ‘우리들의 광주’로 거듭난 ‘그들의 광주’ “……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 ……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 1988년 ‘광주는 살아 있다’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정권 교체와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되찾은 제37회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은 뒤틀려만 가던 광주의 명예를 되살려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5·18 기념사를 통해 표정두, 박래전 등 이름조차 희미했던 열사들을 호명하며 서러운 죽음과 고난이 없는 대한민국을 약속했다. ‘그들의 광주’가 밝힌 촛불이 그들을 드러내는 빛으로, ‘우리들의 광주’로 거듭난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1980년 5·18에는 광주‘만’이 싸워 그곳의 사람들이 학살되고 패배했지만, 1987년 6·10에는 전 국민이 광주‘와’ 함께 싸웠기 때문에 국민의 승리로 기록될 수 있었다. 따라서 광주가 진압된 5월 27일은 끝이 아니라 투쟁이 시작된 날로 기억되어야 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세월에 묻혀온 이들을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발굴해 책으로 엮은 저자의 노고가 많은 독자들에게 위로로, 울림으로, 삶의 방향키로 다가가기를 희망한다. [책속으로 추가] 어머니 고복단이 서울 고려병원에 도착한 것은 3월 7일 새벽 3시, 그러나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경찰은 가족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고복단이 아들을 볼 수 있었던 건 10시간이 지난 뒤였다. 경찰은 병실 면회를 5분 동안만 허락했다. 표정두는 온몸이 숯덩이가 된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온몸이 시커멓게 된 저 남자가 아들인지 아닌지 고복단은 알 수 없었다. 내 아들 정두가 맞느냐고 의사에게 반문할 정도였다. 그러다 병상 옆에 벗어둔 표정두의 가죽신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오매 어쩌까.” 아들 정두가 용접할 때 불티가 튀어도 다치지 않으려고 신었던 그 가죽신이었다. 경찰은 오열하는 어머니를 끌어냈다. _279쪽, 표정두 고인(故人)이 된 다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비교했을 때 황보영국과 관련한 자료는 터무니없이 적고 부족하다. 일기나 메모는 행방이 묘연하고 시신은 화장됐다. 제대로 된 수사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생각으로 분신을 결심했는지는 주변 상황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대다수 국민들이 광주사태라 부르고 있었고 또 상당수 사람들은 간첩의 소행쯤으로 알고 있던 1987년, 26살 부산 청년은 어떻게 해서 광주학살의 진실을 알게 됐을까? …… 황보영국이 분신하기 한 달 전 부산 시민들은 난생처음 보는 잔인한 사진들을 보러 사진전시회에 몰리고 있었다. 천주교 부산 교구가 1987년 4월부터 6월까지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의거
5월 30일은 5·18이 진압된 지 만 사흘이 되는 날이었다. 모든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가 요구하는 대로 광주에서 폭도들에 의한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고 보도할 뿐, 광주에서의 학살 혹은 광주에서의 항쟁 소식을 알지도 못했고 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의기가 작성한 전단지 내용을 확인한 계엄군 지도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의기가 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 광주의 진실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엄 당국은 도대체 어떻게 김의기가 그 사실을 알아냈는지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집 수색에 서는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경찰은 수색 세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마장동 김의기 집을 찾아 비로소 김의기가 숨진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_ 44쪽, 김의기
김종태가 분신하면서 뿌린 전단지는 두 가지 종류였다. 하나는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제목의 세 장짜리 긴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명서」라는 제목의 한 장짜리 짧은 글이었다. 김종태의 단정하고 정성스러운 글씨가 인상적인데 철필로 써 내려간 것을 등사해 만든 것이었다. 전국에 수만, 수십만 명의 기자와 대학생, 지식인이 있었지만, 광주에서의 참상을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 있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던 1980년 6월이었다. _94쪽, 김종태
‘피 묻은 권력’에 굴복할 수 없어 싸웠고, 그 결과 법정에 서게 됐다는 유시민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학생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독백을 인용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유시민이 「항소이유서」를 쓴 날인 5월 27일은 여러 의미에서 특별한 날이었다. …… 유시민에게 5월 27일은 5년 전, 계엄군에 맞선 광주 시민들이 전남도청에 장렬히 산화한 날이요, 인간 구원을 위해 부처님이 세상에 온 날임과 동시에 벗이요 동지인 김태훈 열사가 4년 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계단을 피로 적시며 숨져간 날이었다. _137~138쪽, 김태훈
중동에서 목돈을 손에 쥐었지만 홍기일의 마음은 1980년 총을 맞은 그날부터 내내 지옥이었다. 사실 중동에 간 것도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눈을 감아도 그때 그 장면이 떠올랐다. 혼자서 페인트칠을 하거나 인부들하고 밥을 먹거나 친구들하고 술을 한잔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날뛰는 모습과 금남로의 시신들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 괴로웠다. 홍기일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였다._175쪽, 홍기일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원에서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곤 했는데, 송광영도 1982년 이 장학금을 받게 됐다. 당시 1만 5000원은 학생에게는 큰돈이었다. 학원비로 쓰든, 생활비에 보태든 했으면 좋으련만 송광영은 그 돈을 길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구두닦이에게 줘버리고 만다. 어머니 이오순이 “집안 형편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야단을 쳤다. 송광영은 “그래도 우리는 집이 있지만 그 아이는 집도 없이 가난하지 않습니까? 저는 좋은 성적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라고 말해 어머니 이오순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 송광영은 평화시장 청계노조 활동과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듣게 된 평화시장의 전태일 열사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됐다. 누군가 전태일의 분신을 두고 지나치게 극단적 방법이라고 비판하면 불합리에 대항한 참된 인간의 선택이라고 항변했다. 전태일의 죽음과 아울러 고향에서 들려온 홍기일의 분신 소식은 송광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_229쪽, 송광영
1986년 3월 5일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 예비군훈련장에는 늘 그랬듯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비군 훈련 프로그램에 포함된 안보 강의가 전두환 대통령을 추어올리는 홍보의 장이 된 것이다. 교관의 눈을 피해 엎드려 잠을 자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깨어 있는 이들은 이 지루한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의장 한 편에서 화난 표정의 남성이 전두환을 찬양 중인 강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33살의 예비군 장이기였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벌떡 일어난 장이기는 강의실에 있던 전두환 대통령의 액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이기는 떨어진 대통령 액자를 군홧발로 짓밟으며 소리쳤다. “광주 시민 학살한 전두환을 처단하자!”_251쪽, 장이기
어머니 고복단이 서울 고려병원에 도착한 것은 3월 7일 새벽 3시, 그러나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경찰은 가족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고복단이 아들을 볼 수 있었던 건 10시간이 지난 뒤였다. 경찰은 병실 면회를 5분 동안만 허락했다. 표정두는 온몸이 숯덩이가 된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온몸이 시커멓게 된 저 남자가 아들인지 아닌지 고복단은 알 수 없었다. 내 아들 정두가 맞느냐고 의사에게 반문할 정도였다. 그러다 병상 옆에 벗어둔 표정두의 가죽신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오매 어쩌까.” 아들 정두가 용접할 때 불티가 튀어도 다치지 않으려고 신었던 그 가죽신이었다. 경찰은 오열하는 어머니를 끌어냈다. _279쪽, 표정두
고인(故人)이 된 다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비교했을 때 황보영국과 관련한 자료는 터무니없이 적고 부족하다. 일기나 메모는 행방이 묘연하고 시신은 화장됐다. 제대로 된 수사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생각으로 분신을 결심했는지는 주변 상황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대다수 국민들이 광주사태라 부르고 있었고 또 상당수 사람들은 간첩의 소행쯤으로 알고 있던 1987년, 26살 부산 청년은 어떻게 해서 광주학살의 진실을 알게 됐을까? …… 황보영국이 분신하기 한 달 전 부산 시민들은 난생처음 보는 잔인한 사진들을 보러 사진전시회에 몰리고 있었다. 천주교 부산 교구가 1987년 4월부터 6월까지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의거 사진전’을 개최한 것이다. 5·18이 아직 ‘광주사태’일 때 충격적인 내용의 사진전이 열리는 것도 ‘사건’이었다. 제 나라 시민들을 향한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살육, 계엄군이 쏜 총에 머리가 날아간 청년, 폐허가 된 광주 도심 ……. ‘5·18 광주의거 사진전’은 부산 시민들이 그때까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던 7년 전 광주의 진실이었다. _308쪽, 황보영국
1987년 시민 항쟁이 헌법 개정을 이끌어냈지만, 또 광주학살의 책임자 전두환을 권좌에서 물러나게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도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두환과 육사 동기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6월항쟁 때 분출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더불어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를 주동한 인물이다. 국민들이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이 쿠데타를 주도한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박래전에게 너무나도 참담한 것이었다. 고작 이런 결과를 보려고 그 고생을 하며 싸웠던 말인가. 1년 전 인파로 가득한 광장의 기억을 떠올릴 때 박래전은 감격에 겨워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군부정권의 연장이었다. ‘헌법’을 바꿔 권력을 교체하면 1980년 광주학살의 책임자 전두환 일파를 처벌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도리어 전두환 일파를 권력자로 뽑고 만 것이다. _330쪽, 박래전
대학생도 아닌 노동자가 그것도 어떤 노동 단체에도 속하지 않았던 개인이 홀로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서였을까. 그의 투쟁은 유난히 외롭고 쓸쓸했다. 김병구의 외롭고 쓸쓸하지만 높고 의로운 투쟁은 숨진 지 12년이 지난 2001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왜 “광주학살 원흉 처단”을 외치게 됐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밝히고자 했던 대선과 총선의 부정 선거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고, 그가 수집했다는 자료 또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살아서도 외로웠던 투쟁은 죽어서도 쓸쓸하고 외로웠다. _380쪽, 김병두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5·18, 열흘의 항쟁
김의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80년 5월)
김종태 광주시민 ·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1980년 6월)
김태훈 전두환은 물러가라! (1981년 5월)
홍기일 성냥이 필요합니다 (1985년 8월)
송광영 대구에는 전태일 광주에는 송광영 (1985년 9월)
장이기 광주 시민 학살한 전두환을 처단하자 (1986년 3월)
표정두 나답게 살고 싶다 (1987년 3월)
황보영국 이 나라를 불쌍히 역소서 (1987년 5월)
박래전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겨울꽃 (1986년 6월)
김병구 외롭고 높고 쓸쓸한 투쟁(1989년 9월)
에필로그 5·18과 6·10 항쟁 그 후 30년
책을 마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