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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원제 : ABC: The Alphabetization of the Popular Mind
시리즈 :
엑스쿨투라
[6]
이반 일리치, 배리 샌더스 저 | 권루시안 역 | 문학동네 | 2016년 09월
ISBN : 9788954642194 / 272쪽 / 517g / 14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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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엑스쿨투라 [6]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침묵과 우리’로 향하는 말과 글의 역사 『텍스트의 포도밭』의 모태가 된 책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여는 대표작! “우리는 농담으로라도 민속적 침묵, 즉 낱말과 언어와 글월이 존재하게 되기 이전의 침묵 어린 공존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책의 후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성찰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열려 있는 단 하나, 저 침묵의 공간을 바보처럼 그리워한다. 그것은 우정의 침묵이다.”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작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침묵과 우리’로 향하는 말과 글의 역사 『텍스트의 포도밭』의 모태가 된 책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여는 대표작! “우리는 농담으로라도 민속적 침묵, 즉 낱말과 언어와 글월이 존재하게 되기 이전의 침묵 어린 공존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책의 후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성찰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열려 있는 단 하나, 저 침묵의 공간을 바보처럼 그리워한다. 그것은 우정의 침묵이다.” 이반 일리치의 후기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작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가 국내 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얼마 전 나온 『텍스트의 포도밭』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특히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가 그 속편 격인 『텍스트의 포도밭』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물론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는 현대사회의 시초로서 민중의 마음(심성, 지성)이 문자화(알파벳화)된 데 초점이 있지만, 넓게 보면 ‘테크놀로지로서의 문자와 읽기 기술’이라는 동일한 범주를 다루기에 두 책 간의 연관성은 생각보다 깊다. 즉 『텍스트의 포도밭』의 태반이 되고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문화적 맥락(context)을 보여주는 자궁 같은 책이 바로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인 것이다. ‘지식의 양식으로서 말과 글이 지닌 영향력’에 관해 배리 샌더스와 나눈 대화가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1988)라는 책이 됐고, 이후 이 책 속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text)을 묵상하는 것’이다”라는 위그의 말이 실마리가 되어 『텍스트의 포도밭』(1993)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에 있기에 두 책은 나란히 읽을 때 더 큰 울림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70년대와 분위기가 다른, 고전학자 이반 일리치를 보게 된다. 다급한 현안 앞에서만 신중하고 단호하게 대안을 제시하던 비판가, 생산성 과잉에 빠진 서구 산업사회와 그 바탕의 개발 이데올로기를 질타함으로써 자극과 성찰을 이끌던 날카로운 사상가는 이제 사회 비판보다 인간 개개의 내면 탐색에 치중한다. 이것이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의 문을 닫고 벗들과 책 읽고 묵상하고 대화 나누며 살던 1980년대 후반의 일리치다. 구체적인 개별 현안에 몰두하던 면모는 근원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일리치에게서 학교, 병원, 운송수단 등 제도화된 사회의 폐해를 경고하는 선지자적 외침이 컸다면 이제는 이 사회를 만든 우리의 안쪽, 나이테의 중심을 향한 운동이 돋보인다. 12세기 스콜라철학의 거장 생빅토르의 위그가 말한 렉티오 디비나(거룩한 독서)의 열망이 동반된 이 여정은 구술의 상실, 시각적 책의 탄생, 번역과 토박이말의 분화, 문법의 힘, 자기(the self)와 자서전의 발명, 반문맹 문자의 구속, 인공어 새말의 폭력 등 귀 중심에서 눈 중심으로의 변화를 다양한 예를 들어 탐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상상도 못할 만큼 멀리 떠밀려와, 방대한 정보의 세계에 갇힌 우리는 어떻게 참뜻에 닿을 수 있을까? 여정의 끝자락에서 이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담담히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말없이 나누는 ‘우리’와 ‘침묵’이 그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내용 소개】 두 개의 구렁, 두 갈래의 길 이반 일리치의 많은 책들이 그렇듯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역시 서양 중세 문학을 공부한 중세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배리 샌더스와 나눈 ‘우정 어린 대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봤을 때 그가 활동하던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독서와 토론을 바탕으로 왕성하게 책을 내던 1970년의 공동 작업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이 글을 쓴 목적이 “우리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뭔가를 권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저 우리에게 새로운 이해를 안겨준 역사 그 자체를 묘사만 할 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는 추측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두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바는 뚜렷하고 매우 울림이 크다. 우선 이들은 광범위하게 문자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보면, 인류 앞에는 인식론적 단절을 가져온 두 개의 깊은 구렁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과거의 구술문화와 단절을 가져온 구렁,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 코앞에 와 있는, 문자를 정보의 조각처럼 여겨 읽기와 쓰기를 정보처리 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구렁이다. 두 저자는 이 위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밝히는 데 집중한다. 오늘날 문자는 강제적인 문자 교육 때문에 기능 문맹을 비롯한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음에도 한편으론 언어가 정보체제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주는 유일한 보루가 된 역설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 탐구는 두 가지 경로를 따라 이루어진다. 하나는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을 묵상하는 것’이라는 생빅토르의 위그의 발견에서 출발하는 경로, 다른 하나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다쟁이 배스의 아내에서 마크 트웨인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 허클베리 핀에 이르는 경로다. 다시 말하면, 이 대조적인 두 갈래 길이 하나는 침묵과 묵상에, 다른 하나는 수다와 거짓말에 각각 바쳐질 것이란 점을 알려준다. * 그럼, 이제 이 구도를 마음속에 새기고 각 장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은 머리말을 빼고 모두 일곱 장―‘낱말과 역사’ ‘기억’ ‘글월’ ‘번역과 언어’ ‘자기’ ‘허위와 서술’ ‘교습되는 모어에서 새말과 꽥꽥일률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에 후기가 붙어 있다. ‘간추린 참고문헌’ 또한 본문을 보완하는 기능을 톡톡히 하므로 그것까지 주의깊게 봐야 한다. 일리치와 샌더스가 밝힌 우리가 처한 오늘의 상황을 성찰해보자는 두번째 구렁에 관한 내용은 말미에 가서야 나온다. 먼 과거로부터 역사를 훑어오기에 생긴 당연한 결과다. 그에 이르기까지 중간중간 풍부한 고전학적 지식이 발휘되면서 시기별로 말의 동결화 과정, 말의 문자화 과정에 대한 묘사들이 감탄할 만큼 시적으로 펼쳐진다. 짧지만 아름답고 심오한 이 책이 일으키는 마음의 파문을 보려면 직접 책을 펼쳐 읽는 수밖에 없다. 알파벳의 발명 ― 구술 시대의 ‘날개 달린 말’을 붙잡다 첫번째 장 ‘낱말과 역사’에서 일리치와 샌더스는 알파벳 문자가 생겨나기 전에 말이 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관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말을 인용해 역사 이전에 기예와 지식의 규칙이 아닌 신성한 열정과 깊은 감정에서 우러나 펼쳐지는 설화가 있다고 강조한다. 구술로 이루어지는 이 설화 시대에는 생각 자체가 날개를 타고 날아오른다. 이야기는 말과 분리될 수 없고 마치 날아가고 있는 새처럼 한곳에 있다가도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이야기꾼은 저만의 실타래를 자아내면서, 낱말 하나하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 없이, 끝없이 이어간다. 소리는 덧없이 사라지는 세계에 속해 있었지만 문자를 글로 적음으로써 소리를 그곳으로부터 구출해낸다. 그렇게 살아 있는 말은 필경사에 의해 해체된다. 필경사는 구술되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음미해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그 뿌리를 고찰해 점토판에 새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시뷜라 덕분에 고대 희랍인은 더이상 델포이의 퓌티아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신탁을 알아듣고자 애써 귀기울일 필요가 없어졌다. 시뷜라가 시간이라는 맥락 속에 들어 있는 말을 시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알파벳의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신탁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 바
중세기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 경로를 따라 걸었다. 하나는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을 묵상하는 것”이라는 생빅토르의 위그의 발견에서 출발하는 경로이다. 다른 하나는 제프리 초서와 그가 지은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너무나 거침없이 말하는 수다쟁이로 등장하는 배스의 아내로부터 마크 트웨인이 쓴 소설의 주인공인 허클베리 핀으로 이르는 경로로, 이들의 말은 묵상이 불가능하다. _14~15쪽
문자문화의 너른 땅을 굳게 딛고 서면 인식론적으로 우리를 단절시키고 있는 깊은 구렁 두 개를 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를 구술문화의 영역과 단절시키고 있는 구렁이다. 다른 하나의 구렁은 스모그처럼 스멀스멀 다가와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는데, 문자를 정보의 조각과 같다고 봄으로써 읽기와 쓰기를 정보처리라는 차원으로 격하시킨다. _15~16쪽
역사학자의 집은 글이라는 섬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섬의 해변을 벗어나면 기억은 낱말이 되지 않는다. 낱말이 남겨지지 않은 곳에서 역사가는 재구성을 위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한다. 낱말이 없으면 유물은 침묵한다. _20쪽
서기전 4세기 때부터 사람들은 기억을 ‘열고 뒤지고 활용할 수 있는 저장고’로 이해했다. 철학자는 이 저장고가 어디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심장에, 뇌에, 공동체에, 또는 어쩌면 하느님 안에 있다고들 했지만, 이런 모든 논의에서 기억은 하나의 궤나 밀랍판 또는 책의 형태를 유지했다. 이 관념을 뒤집었다는 점에서 밀먼 패리는 거의 아인슈타인에 가깝다. _35쪽
책 안에 있는 ‘글월’이라는 관념은 지면 위에 있는 가시적 요소들이 커다란 변화를 거치지 않고는 생겨날 수 없었다. ‘글월’의 출현은 지면 위에 있는 글줄과 색의 배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현대의 문맹자, 즉 『켈스의 서』에 사용된 인슐라 글꼴을 해독하지 못하거나 라틴어를 한 문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알 수 있다. 구텐베르크 이전 800년 동안 필사본의 지면이 변모하는 과정을 보면 서양에서 마음이 생겨난 단계를 알 수 있다. _59쪽
글자가 사회를 바꾼 두번째 방식은 글자 자체의 상징성이 문화의 이면으로 파고들어 글로 적힌 말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의 인식을 바꿨다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연구가 훨씬 덜 이루어졌으며 논하기도 훨씬 더 어렵다. _60쪽
중세기에는 맹세뿐 아니라 이전에 구술의 지배를 받던 일상생활의 폭넓은 영역까지도 새로운 종류의 형식적, 법적 문자문화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 시기에 인구 중 많은 사람이 사물을 소유하거나 권리를 행사하기 이전에 그것을 묘사해 양피지에 보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뢰가 말로 하는 약속에서 인장이 찍힌 문서로 옮겨간 것이다. _65쪽
수도원 필사실에서 책 사본을 만드는 것과 대법관청에서 양도증서 사본을 만드는 것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책의 원본은 수도원에 남아 있었던 반면, 양도증서의 원본은 대법관청을 벗어났던 것이다. 대법관은 남아 있는 사본이 이덴iden, 그러니까 원본과 동일identical하게 할 책임이 있었다. _70쪽
생명의 책이 그리스도교의 설교에서 중요해진 저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펜을 쥐고 양피지에 문자를 그려넣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베르나르의 필사실 구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2세기 초 클레르보 수도원의 원장이던 베르나르는 자신의 손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키케로처럼 수도원장은 필경사를 두고 또박또박 명확히 들리도록 말하며 받아적게 했다. _75쪽
12세기를 거치는 동안 문자로 적힌 글월은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시각적으로 고정됐다. 시각적으로 고정된 글월에서 특정 요소는 돌출되게 했다. _81쪽
이제 세계는 묘사된 모습으로 독자의 눈앞에 놓여 있다. 책은 이제 임의로 접근이 가능해졌다. 독자는 색인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든 마음대로 그곳을 찾아갈 수 있다. 글로 적힌 내용을 독자는 눈으로 보며, 이때의 시각화 과정을 삽화가 도와준다. 독자의 전거는 스승이 아니라 저자로 인식된다. ‘그 자신이 말했다ipse dixit’는 이제 ‘그 자신이 썼다ipse scripsit’로 바뀌었다. (…) 13세기 말에 이르렀을 때 파리의 학생들은 대출이 가능한 도서관에서 필사본을 빌려 수업시간에 스승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_82쪽
이제 정말로 독자는 생빅토르의 위그가 1128년에 말했던 그대로 말할 수 있다. “Trimodium est lectionis genus: docentis, discentis vel per se inspicientis.”(내가 네게 [소리를 내어] 읽어줄 수 있고, 네가 내게 [소리를 내어] 읽어줄 수 있고, 내가 나 자신에게 명상적으로 읽어줄 수 있다.) 이제 교사가 하는 활동으로서의 읽기, 다시 말해 소리를 내어 읽기와 듣는 활동으로서의 읽기는 제3의 소리 없는 유형의 읽기로 보완된다. 그것은 곧 책을 명상하며 읽는 것이다. _83쪽
번역자는 경계 자체를 만들고 그 너머로 건너가 노획물을 품고 이리로 건너온다. 그는 야만스러운 지껄임이 오가는 저 야생지대를 ‘저편’ 강기슭으로 바꾸어놓는 뱃사공과 같다. 번역자란 구술문화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 세계에서는 오스만제국의 재판관 집무실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 ‘드라고만’ 같은 역관도, 두 글월이 서로 일치하는지를 잘 아는 독일의 ‘돌메체르’ 같은 해석자도, 같은 내용을 동시에 말하는 국제연합의 ‘동시통역사’도 없다. 이들 모두는 글월의 직공들이다. (…) 오늘날 번역은 한 글월을 다른 글월로 바꾸는 것을 나타낸다. 그 이면에는 글월 속에는 내용물이 담겨 있어—어휘, 문법, 발음, 문맥 등 나름의 특색을 지닌—하나의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그 내용물을 옮겨 부을 수 있다는 관념이 놓여 있다. _86~87쪽
라틴어에 대한 알퀴누스의 생각은 제국 전체에 걸쳐 하나의 발음법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발음법은 만민(겐테스gentes)에게 쓸모가 있어야 할 라틴어 글의 기능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었다. _98쪽
토착 문법이 처음으로 생겨나기 이전에—다시 말해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링구아나 방언이나 아블라(말)는 칸칸이 구분된 서랍장의 서랍이라기보다는 무지개 속의 색깔에 더 가까웠다. _100쪽
언어의 역사에서 또하나의 이정표에 해당하는 사건은 1492년 8월 18일에 일어났다. 콜럼버스가 돛을 올린 지 겨우 보름이 지난 이날, 엘리오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라는 이름의 스페인 사람이 『카스티야어 문법서』를 펴냈다. 근대 유럽 언어 중 최초인 이 문법서는 하나의 토착 언어를 일련의 문법 규칙으로 격하시키려 한 책이다. _103쪽
콜럼버스는 신세계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네브리하는 스페인의 신민이 쓰는 언어를 표준화할 방안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을 고안해냈다. _109쪽
‘자기’는 낱말과 기억, 생각과 역사, 거짓말과 서술 등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문자적 구성개념이다. 구술 시대에 구전 서사시와 그것을 노래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서술과 자기는 서로 떼어놓기가 불가능하다. 작가는 이야기를 자기의 일부처럼 자아낸다. 20세기의 시민은 갖가지 과학의 눈을 통해 자기를 글월이 켜켜이 쌓인 케이크처럼 바라본다. 18세기 이후로 국가는 문자의 신문 대상이 된 자기들의 집합체가 되었다. _113쪽
『헨리 애덤스의 교육』은 자신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실패한 애덤스와 또다른 애덤스 간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애덤스는 문학적으로 별난 태도를 취한다. 『헨리 애덤스의 교육』은 헨리 애덤스가 들려주는 헨리 애덤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제3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따라서 우리는 두 명의 애덤스를 경험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실제 애덤스인 옛 애덤스와, 나이가 든 작가인 새 애덤스이다. 그런데 애덤스가 둘인 것보다 더 희한한 것은, 기억이나 회상을 빌려 문학적으로 창조된 젊은 애덤스가 나름의 생명을 얻어 새 애덤스를 가르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_122쪽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는 방식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책은 지면을 보며 소리 없이 읽지 않으면 의미를 잃는다. 소리 나는 대로 적은 허클베리의 무지한 산문을 읽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자능력에 결박당한다. 트웨인이 의도한 유머를 모조리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허클베리의 문장을 보아야 하며 귀로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허클베리의 ‘sivilization’을 소리 내어 읽으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실수의 아이러니를 놓친다. 트웨인이 허클베리를 아둔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면, 한편으로 우리를 벙어리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_152쪽
19세기 사람 누구도 우리가 문자에 단단히 매달려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라지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사람들은 지금 컴퓨터 문자문화를 추구하느라 기계의 힘에 예속되고 있다. 우리가 트웨인만큼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_157쪽
새말Newspeak[『1984』에서 나오는 가상의 언어]과 꽥꽥일률uniquack은 이란성 쌍둥이다. 컴퓨터가 아직은 신기한 물건에 지나지 않고 또 유니백UNIVAC이 유일하게 구입 가능한 컴퓨터 상표였던 1950년대에, 제임스 레스턴이 사설의 여담으로 ‘꽥꽥일률’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우리 두 저자는 일정한 형태가 없는 아메바 낱말을 가리키는 말로 꽥꽥일률이라는 용어를 택했다. 이런 낱말은 ‘특정 활동과 한데 묶여서 의미를 띠는’ 것도 아니고 ‘특정 형식의 사고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_162쪽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체계 내 두 요소 간의 정보교환으로 격하시키는 것—오늘날 우리가 ‘체계이론’이라 부르는 것—이것을 오웰은 ‘집단 유아론唯我論’이라 불렀다. _172쪽
탄탄하고 좋은 낱말을 일상에서 말할 때 이처럼 전문어의 방식으로 말하면 아메바 낱말이 줄줄이 만들어지는데, 이런 낱말은 수학자의 ‘E’처럼 어떤 의미도 띠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부산물이 만들어지면 우리가 새말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한 언어에 대한 태도가 조장된다. 전문용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이런 폐기물은 공해와 비슷하다. 생산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만들어진 부산물이 우리가 보고 만지고 숨쉬고 먹는 거의 모든 것 속에 침투해 들어가 변형과 퇴화를 가져온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전문용어의 폐기물 역시 일상 언어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전문용어의 폐기물은 대부분 일상 대화에서 그저 혼선만 만들어낼 뿐으로, 경제성장 때문에 세상을 뒤덮는 회색 시멘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폐기물 중 많은 수는 아메바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서, 불길한 의미를 가득 담는 한편 원래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채 더운 공기를 타고 날아올라 퍼질 수 있다.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신중한 사람은 그런 낱말에 대해 종종 어쩔 수 없이 사용 중지를 선언하게 된다. _175~176쪽
낱말과 마찬가지로 침묵 역시 알파벳의 산물이다. 낱말과 낱말 사이의 공백, 소리 없이 글월을 곰곰 생각하는 행위, 명상의 침묵 등은 모두 알파벳식 침묵의 갖가지 형태다. 우리는 침묵할 때도 문자의 인간이어서, 알파벳 영역 안에 있는 역사의 섬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대부분 낱말이 생겨나기 이전의 침묵에 대해 기껏해야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대다수는 그 반대의 길로 나아가, 침묵을 뭔가 기계적인 것으로, 삑과 삑 사이의 공백으로 바꾸었다. _179쪽
침묵이 문자화되면서 ‘나’ 그리고 분석적인 우리의 새로운 고독이 생겨났다. 지금 우리는 소통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 글월 속의 한 줄이다. 낱말 앞에 오는 침묵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어떤 양식이 자리잡기 이전의 혼란한 잡음 속 메시지가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글월 이전 구술 시대의 우리, 양심 속에서 이어온 ‘민속적’ 우리는 현실로부터 사라졌다. 우리는 민속적 우리가 분석적 우리로 바뀌는 과정에 침묵의 역사가 개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_182쪽
우리는 농담으로라도 민속적 침묵, 즉 낱말과 언어와 글월이 존재하게 되기 이전의 침묵 어린 공존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책의 후예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성찰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열려 있는 단 하나, 저 침묵의 공간을 바보처럼 그리워한다. 그것은 우정의 침묵이다. _188쪽
목차
머리말
1. 낱말과 역사
2. 기억
3. 글월
4. 번역과 언어
5. 자기
6. 허위와 서술
7. 교습되는 모어에서 새말과 꽥꽥일률로
후기ㅡ침묵과 우리
간추린 참고문헌
이반 일리치 연보
옮긴이의 말
주요 용어와 고유명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