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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9667635 / 768쪽 245 x 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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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한국 연극예술사에 남은 위대한 족적, 이해랑(李海浪) 평전 장장 6년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이동극장운동을 펼치고, 예총 회장을 다섯 번이나 역임, 집권당의 현역 의원으로 활동하며 문예진흥법 제정에 앞장선 이해랑의 삶을 살펴보다! 학자로서의 삶을 한국 연극학, 연극사 저술에 바쳐오면서 수많은 명저를 쓴 유민영 선생(서울예대 석좌교수)이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저술한 평전이다. 작년 봄, 동랑(東郞) 유치진(柳致眞)의 평전에 이어 이번에는 그의 제자 이해랑의 평전을 내놓았다. 저자는 이해랑을 “자신 앞에 닥친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중에서 처음부터 일관되게 어려운 길을 택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대부 종손으로 태어나 연극의 매력에 빠져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부터 형극의 길에 접어든 듯하다. 연기에서 연출로 방향을 튼 이해랑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어용 국책극을 하지 않았다.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는 예술이 어떤 사상의 도구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흥행하던 너절한 웃음을 파는 희극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신극을 주창하며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나아갔다. 철저한 리얼리스트로서 극장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7년 동안 이동극장운동을 전개하며 500만여 명의 관객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연극인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현실 참여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확신하여 망설임 없이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문화계의 고질병인 가난을 퇴치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처럼 이해랑은 어려운 때에 나보다 남을 생각하고 일했던 유능한 리더였다. 가정 안에서도 자유.배려.사랑.법도의 가풍을 세우며 5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이 책에는 이해랑이 한국 연극의 거인으로 불리는 이유가 오롯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 연극사가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평소 “으흠” 하는 권위의식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던 그의 삶 속에서 오늘날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인품도 배울 수 있다.
나는 세 가지 역을 맡았는데 사령, 농부, 그리고 잔치 장면에서의 지방 관리 역이었다. 무대 연습 하는데 분장을 하고서 했다. 일본 분장사가 와서 내 얼굴에 분장을 해주면서 “네 배역이 뭐냐” 해서 “늙은 농부로 나온다” 했다. 그랬더니 얼굴에 주름살도 그리고 수염도 붙이고 가발도 씌웠다. “다 됐으니 거울을 가 봐라” 한다. 거울에 비춰보니 내가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스무 살 먹은 내가 60~70세 노인이 돼 버렸다. 나는 그때 내가 연극에 첫발을 디디면서 처음 한 말을 기억한다. “아하! 이게 연극이구나.” “내가 내 현실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변모한 이 사람의 생활을 하는 것이구나.” 연극의 매력이랄까, 다른 데는 맛볼 수 없는 느낌을 첫 무대에서 분장된 얼굴을 보고 깊이 깨달은 것이다. 조부모님 슬하에서 또 독자(獨子)로서 어렸을 때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 막연하게 꿈꿔왔던 것을 바로 거기서 찾은 것이다. 어릴 때 동경하던 다른 세계가 바로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는 데서 쾌감을 느낀 것이다. 스무 살까지 자라면서 내 속에 잠재해 있던 꿈이랄까, 그런 걸 처음 체험한 것이다. (115~116면)
“그런 망발이 어디 있나. 나는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신협 선전을 했다. 한국에 신협이란 극단이 있다고 자랑하고 왔는데 웬 말이냐 안 된다. 어떡하든 싸워서 신협 이름을 되찾아라.” 그 양반 말씀을 듣고 나로선 저항할 길이 없었다. 다시 국립극장에 가서 신협 이름을 주장했다. 운영위원회는 그것 때문에 연일 모여서 안 된다느니, 꼭 그렇게 해야 하느니 시비가 붙었다. 신협이란 문제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로선 샌드위치가 된 꼴이었다. 국립극장 운영위원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고, 유(柳) 선생이 주장하는 것도 전적으로 아집이라 하기 어려웠다. 전에 극협(신협의 전신)을 조직할 때, 유 선생을 고문 또는 지도위원으로 받들었었다. 신협을 조직할 때의 그 정신을 생각할 때 그분의 신협 명칭 고집은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좌우지간 선배들의 시비와 압력 사이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 결국 그는 유치진의 명분이냐 20여 명 단원들의 생계냐는 기로에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국립극장을 떠나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 그 역시 국립극단을 떠나면 당장 일곱 식구의 생계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고행의 길을 택한 것이다. (354~355면)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그가 솔직히 시걸, 농어촌을 잘 모르는 순수 서울 토박이인 데다가 전형적인 사대부 출신의 귀골(貴骨)임에도 불구하고 지방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환경이 열악한 시골을 다녀야 하는 유랑 극단을 각오했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서 자신보다는 전체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아는 그의 지도자다운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주 느꼈던 소감과 관련하여 “상아탑의 지식을 할 일 없이 놀리는 게 못마땅해 기회 있을 때마다 농촌 문화의 개척자가 될 것을 당부했으나 도무지 탁한 서울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시골이 지닌 슬픔과 애향심을 눈으로 직접 보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근대 연극사상 최초의 경우로서 그처럼 지방 문화 진흥을 절박하게 생각한 연극지도자는 없었다. 그는 두 미국 연극인의 충고를 듣고 지금이야말로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순회극운동을 실천에 옮겨야 할 절박한 시점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407~408면)
그 당시 그는 5선의 예총 회장에다가 힘센 여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유일한 문화전문가였기 때문에 정부와 국회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또 반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특히 정부에서 발의한 문화예술진흥법(文化藝術振興法)을 국회에서 강력히 뒷받침하는 역할에 몰두했다. 그는 문예진흥법 제정에 선도적 역할을 하면서 문화예술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했다. 그는 문예야말로 인간 정신의 가장 뛰어난 표현인 동시에 일상적 삶을 뛰어넘는, 호한(浩澣)하고 위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조되는 독창적 산물임을 강조했다. 마침 문예진흥법이 논의될 당시에 김종필 씨가 힘센 총리로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잘되었다. 결국 문화예술진흥법은 그가 의회에 진출한 1년 뒤인 1972년 가을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때 그의 역할은 눈부신 것이었고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법 제정 과정에서 문화예술진흥에 관한 주요 시책을 심의하는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설치와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약칭 문예진흥원(文藝振興院)] 설립을 명시토록 하는 데도 일조했다. 결국 여러 과정을 거쳐서 1972년 11월 문화예술진흥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3월 역사적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455~456면)
연극의 세계는 그들에게 허용된 무대 공간의 제한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대에 장치해놓은 창문을 통하여 그 밖에 존재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와 온 세계 인류와 맥을 통하고 있으며 무대에 선 배우의 연기 또한 그 호흡이 우리 생명의 심원(深遠)의 호흡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극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에 더 큰 극적 가치가 존재하며 창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나 그들의 마음의 눈에만 진실한 면모를 나타내 보이는 예술입니다. (……) 그들이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고 느끼는 한없는 것들을 한정된 무대 공간에 압축하여 표현함으로써 우주를 상징하는 별빛처럼 아름답고 알찬 인생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연극의 제약에 결코 불편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알차고 강력하게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데 대하여 깊은 매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509면)
그는 평생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살아온 대가라도 받은 듯이 5남매를 훌륭하게 키운 예술가로 소문나 있다. 그의 자녀 5남매는 하나같이 두뇌가 명석하고 준수해서 명문 대학을 나왔으며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실 연극을 하느라고 가정을 돌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실제로 자녀 교육과 가정 경제는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다만 그는 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전혀 사도(邪道)로 흐르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했어도 자녀에 대한 정신적 훈육과 사랑만은 지극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성격대로 자녀들을 자유분방하게 키운 것이 특징이다. 다만 가정이 너무나 궁핍해서 자녀들의 성장기에 고통이 따랐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5남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연극을 택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아버지 직업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595면)
머리말
이해랑(李海浪) 가계(家系)
서장: 그를 왜 한국 연극의 거인이라 부르는가
Ⅰ. 호야형(好爺型) 인문주의자
Ⅱ. 시련과 방황의 시대-가계와 성장 과정
1. 조선조 능원대군의 후예
2. 출생과 성장-고독과 절망과 시련의 계절
3. 지체 높은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 광대
4. 그의 순탄했던 연극수업 시대
Ⅲ. 연극 입문의 시련과 황홀함의 교차
1. 연극 수련의 험로
2. 귀국, 그리고 험난한 직업 연극의 길로
3. 사랑과 결혼
4. 민족 해방과 연극계 리더로서의 부상
Ⅳ. 젊은 연극 지도자의 형극의 길
1. 극예술협회(약칭 극협)와 민족극의 정착
2. 전쟁 속의 연극운동
3. 환도와 개인적 승리
4. 영상예술로의 진출과 회귀
Ⅴ. 예술과 현실 참여의 조화
1. 이동극장운동과 예총의 이해랑 시대
2. 이동극장의 팡파르
3. 연출하는 현역 국회의원
4. 원숙한 연출과 생의 찬가
Ⅵ. 리얼리즘에 기반한 독창적 연극론의 형성
1. 이해랑의 독창적 연극론의 실체
2. 스타니슬랍스키와 그의 배우론
3. 연출관의 배경과 그 구체적 실제
4. 인생 황혼을 불태운 열정
Ⅶ. 가족애의 전범과 성공한 자녀들
1. 자유.배려.사랑.법도의 가풍
2. 소멸하는 시간 속의 아련한 추억
3. 인연
종장: 낙조를 붉게 물들이고 홀연히 떠나간 고종명(考終命)의 복인
참고문헌
주(註)
이해랑(李海浪) 연보(年譜)
이해랑 연출 작품 리스트
이해랑 출연 작품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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