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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시스템 1800. 1900 기록시스템

원제 : Aufschreibesysteme 1800 1900
시리즈 :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11]

프리드리히 키틀러 저 | 윤원화 역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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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4638678 / 816쪽 138 x 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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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동시대 가장 경이로운 미디어학자이자 이단적 문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대표작, ‘문학 엄숙주의자’들을 경악에 빠뜨린 문제적 고전, 말 만드는 자들에게 내리꽂힌 질문의 책! ‘말’이 세계를 창조한 ‘말씀’의 반영으로도, 세계를 투시하고 조직하는 순수정신의 직접적 매개체로도 상상될 수 없는 시대ㅡ 말이란 무엇이고, 말의 세계란 무엇이며, 말과 문학의 영점을 재정의하는 ‘미디어’란 무엇인가? 문학-미디어 연구의 새로운 창을 열어젖힌 혁명적 저작, 말 만드는 자들과 기술로 운신하는 자들의 좌표를 내리긋는 “미디어 이... 동시대 가장 경이로운 미디어학자이자 이단적 문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대표작, ‘문학 엄숙주의자’들을 경악에 빠뜨린 문제적 고전, 말 만드는 자들에게 내리꽂힌 질문의 책! ‘말’이 세계를 창조한 ‘말씀’의 반영으로도, 세계를 투시하고 조직하는 순수정신의 직접적 매개체로도 상상될 수 없는 시대ㅡ 말이란 무엇이고, 말의 세계란 무엇이며, 말과 문학의 영점을 재정의하는 ‘미디어’란 무엇인가? 문학-미디어 연구의 새로운 창을 열어젖힌 혁명적 저작, 말 만드는 자들과 기술로 운신하는 자들의 좌표를 내리긋는 “미디어 이론의 고전”(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동시대 그 어떤 학자보다 미디어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난 인물”(가디언)이자 “독일정신사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 학자”(디 차이트) 프리드리히 키틀러(1943~2011)의 대표작 《기록시스템 1800·1900》(1985)이 독일에서 출간된 지 30년 만에 번역 출간되었다. 방대한 문헌을 가로지르는 눈부신 사유와 문장들 덕분에, 관련 미디어 연구가들과 번역가들이 숱하게 번역상의 난해함을 지적해왔던 고전 중의 고전이다. 키틀러의 중기 사유가 담겨 있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 강의록 《광학적 미디어》를 번역했던 시각문화, 미디어, 미술 관련 번역가이자 연구자 윤원화가 키틀러의 사유를 특징짓는 ‘불연속의 연쇄’를 촘촘히 뜯어 번역했다. 문학의 역사를 정보시스템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 이 책은, 발표 당시 문학 연구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교체를 이뤄냈다는 찬사를 받은 한편, 동시대 문학자들에게 격렬한 반발을 사며 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하나의 사건과도 같은 저서다. 또 우리에게는 “미디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사물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미디어다” 등의 기술결정론적 테제로 두루뭉술하게 알려져 있던 유럽 최고의 미디어학자이자 이단적 문학자의 사상적 출발점을 원전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는 첫 기회이기도 하다. 묻혀 있던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적 관점에서 엮어붙이는 사유의 독창성뿐만 아니라 마력이 넘치는 문장들로 글을 발표할 때마다 독자들을 놀라게 했던 키틀러 특유의 눈부신 언어의 향연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오늘날 우리가 거주하는 ‘존재의 집’을 밝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제11권. “글의 독점체제가 폭파된 이후, 글의 기능을 재검토하는 것은 가능하고도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은 감정의 배치가 아니라 기술이 개입하는 실증적 현실, 시스템이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인간과 기표를 잇는 접속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면 역사의 흐름이 바뀌고 존재가 닻을 내리는 곳이 달라진다.” 자크 라캉 ■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발레리의 ‘파우스트’까지, 정보시스템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 미디어로서의 (독일)문학사 “대학 제도와 대학의 대변인들을 이토록 조롱하는 교수자격취득 논문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독문학자 게르하르트 카이저의 말이다. 분과학문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특히 동시대 프랑스 이론을 열성적으로 흡수했던 키틀러가 198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독일문학사 전공 교수자격취득 논문으로 《기록시스템 1800·1900》을 제출했을 때, 심사위원들은 이 저술이 ‘독일문학사’ 연구논문으로 적합한지를 두고 격렬한 공방을 벌인다. 결론이 나지 않는 찬반양론 속에서 심사는 2년 가까이 계속되고 심사위원은 13명으로 불어난다. 마침내 ‘가까스로’ 통과된 이 논문이 1985년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 키틀러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동시대 가장 변칙적 필자이자 이단적 문학자 키틀러의 출발을 알린 떠들썩한 첫 신호였다. 제도에 안전하게 발을 들이는 것보다 중요했던 그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글의 독점체제가 깨진 시대에, 언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학자의 빛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비추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 문제는 대학 제도 내부에서 안전하게 말을 짜나가는 것으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었다. 따라서 키틀러는 질서 내부를 벗어나 시스템 자체를 조명할 수 있는 외부적 관점을 들여온다. 그렇게 도출된 방법론이 미셸 푸코의 담론분석을 참조한, 그러나 문서 자료에 그치지 않고 기술적 장치와 그 산물까지 아우르는 ‘기록시스템’이다. “임의의 문화에서 유의미한 데이터를 송부, 저장, 처리하는 기술적, 제도적 네트워크”를 뜻하는 이 시스템을 렌즈 삼아 키틀러는 말과 행동, 인식과 판단의 주체로서 ‘인간’의 역사를 가능하게 했던 객관적 조건 또는 ‘환경’의 역사를 기술해나간다. 문학이라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를 헤집어내기 위한 이 기획은, 역사의 거대한 불연속을 두 번 날카롭게 끊어서 그 단면을 해부하는 것으로 실행된다. 두 번의 경계를 설정하는 핵심적인 사건은 교육학, 시, 철학을 변수로 둔 ‘1800년경의 알파벳 학습의 보편화’와 미디어 기술, 정신물리학, 문학을 변수로 둔 ‘1900년경 기술적 데이터 저장장치의 발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문학사 연구라는 틀에 걸맞게 키틀러는 1800년경 불연속의 시작점에 괴테의 전인적 인간 ‘파우스트’를, 1900년경 또다른 불연속의 끝에 구시대의 정신이 사라지고 오직 욕망으로 웃는 발레리의 ‘파우스트’를 내세운다. ■ 1800년식 기록시스템: 어머니의 알파벳 교육을 통해 출현한 시인들이, 영화처럼 환각적이며 철학으로 해석할 수 있는 책을 만든다 첫번째 불연속은 1800년경, 읽고 발췌하고 주해를 다는 것이 전부였던, 생산자도 소비자도 없이 그저 말들을 회전시키는 문예공화국을 가르고 지나간다. 저자도 독자도 없이 말들만 끝없이 순환하던 옛 시스템은 인간이 주체의 위치에 등극하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정신과 글쓰기의 관계를 좌표축으로 삼는 새로운 시스템이 태동한다. 그리하여 성서와 오래된 문헌들 대신 자유로운 글쓰기가 대두되는바, 1800년식 기록시스템은 입에서 입으로 달콤하게 언어를 가르치는 ‘어머니 자연’, 그리고 입으로 익힌 언어를 손으로 숙련시키는 사법적·관료적·정치적인 권력인 ‘아버지 국가’를 마련한다. 이 둘의 긴장 관계 속에서, 역사의 무대에 오르는 이들이 시인과 공무원이다. 키틀러는 이 시대의 시인을 근본적으로 자녀와 학생을 문화의 정신으로 이끄는 교육공무원들로 위치짓고, 이 시대에 출현한 근대적 대학과 시문학 해석, 시문학 정전을 시인을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제도이자 질서로 한계짓는다. 괴테, 슐레겔 형제, 헤겔, E. T. A. 호프만 등 모든 위대한 시인들이 1800년식 기록시스템 속에서는 시스템의 개체들에 불과하다. 이는 호프만의 「황금 단지」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철학에 관하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이 낭만주의 시대에 책과 글이 신비로운 권위를 갖게 된 것은 (1) 책을 제외하면 그와 경쟁할 만한 다른 시청각 미디어가 전무했기 때문이고, (2) 한없이 고귀하고 어려운 철학이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독일 시문학은 핵가족이 생산하고, 교양계급이 증폭하고, 철학이 절대적인 ‘학문’의 이름으로 해석하고 정당화한 시스템의 효과가 된다. 1800년식 기록시스템을 분석한 장의 제사인 오일러의 공식 “eix\u003dcosx+isinx”는 바로 이러한 발전과 공모의 알고리즘을 나타낸다. 한편 철학자들과 시인들이 문자로 쓴 글을 토대로 자신들의 권위를 다져나가는 동안, 말을 가르치는 여성들은 단일하고 비가시적인 자연이 된다.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손을 잡으면서 여성은 저자를 만들면서 사라지는, 학문

저자 소개

1943년 독일 동부 작센 주 로흘리츠에서 태어나, 1958년 서독 국경지역 라르로 이주한다. 196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입학해 독일어문학, 로망어문헌학, 철학을 공부하며 하이데거, 니체와 더불어 라캉, 데리다, 푸코 등 동시대 프랑스 이론을 흡수한다. 1976 년 스위스 작가 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82 년에 독일문학사 전공 교수자격취득 논문으로 독일문학사를 정보시스템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 『기록시스템 1800·1900』을 제출하여 파란을 일으킨다. 2년 가까이 심사가 계속되고 심사위원이 열세 명으로 늘어난 끝에 논문이 통과된다. 그사이 키틀러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와 스탠퍼드 대학 등의 방문교수 자격으로 미국에 머물며, 당시 급성장하던 컴퓨터 문화를 접하고 군산복합체와 미디어 기술의 역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1986년에 미디어 기술의 실증적 역사에 대한 추가 연구를 바탕으로 『기록시스템 1800·1900』의 1900년경 파트를 확대·재구성한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출간하면서, 독창적인 미디어학자로 입지를 넓힌다.
 1987년에 독일 보훔 대학 현대독일문학 교수로 부임한 그는 20세기 미국에서 형성된 새로운 기술의 전개 방향에 주목하는 한편, 정보이론의 관점에서 유럽 문명의 밤과 어둠, 그 한계와 전망에 대한 성찰을 지속해나간다. 1990년에 『기록시스템 1800·1900』의 영역판이 출간되면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93년 베를린 훔볼트 대학 매체사 및 미학 교수로 취임한다. 1999년 『축음기 영화 타자기』의 영역판이 출간되면서 “미디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는 기술결정론적 테제가 키틀러의 유명세를 견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무렵 키틀러는 이미 기술 자체에 열중했던 시기를 지나 유럽 문명의 과거로부터 평행우주적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2005년과 2009년에 고대 그리스를 다시 시작점으로 두고 유럽 문명의 비전을 새롭게 그리는 장기 프로젝트의 첫 성과로 『음악과 수학 I. 헬라스 1: 아프로디테』와 『음악과 수학 I. 헬라스 1: 에로스』를 발표한다. 그러나 전체 프로젝트는 2011년 키틀러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중단된다.
 키틀러가 생전에 펴낸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시인, 어머니, 어린이』(1991), 『 드라큘라의 유산. 기술적 글쓰기』(1993), 『헤벨의 상상력. 어두운 자연』(1999), 『문화학의 문화사』(2000), 『광학적 미디어』(2001), 『그리스로부터』(2001), 『잡음과 계시 사이. 목소리의 문화사와 매체사』(2002), 『불멸하는 것. 부고, 기억, 유령의 말』(2004) 등이 있다. 그의 원고들과 자료들은 마르바흐 독일어문학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역자 소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예술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키틀러의 베를린훔볼트 대학 강의록 『광학적 미디어』(2011)를 비롯하여『하이테크네』(2004, 공역), 『컨트롤 레벌루션』(2009), 『청취의과거』(2010), 『기록시스템 1800.1900』(2015) 등이 있다. 현재미술, 시각문화, 미디어 관련 번역가 겸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책 속에서

독일 시문학은 한숨과 함께 시작한다.

“아아! 이제껏 철학,
법학과 의학,
유감스럽게도 신학까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속속들이 연구하였도다.”

여기서 한숨을 쉬는 것은 문장에 등장하지도 않는 이름 없는 ‘나’도 아니고, 하물며 이름 있는 저자는 더더욱 아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도입부를 이루는 저 전통적인 크니텔시행의 음률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떤 순수영혼이다. (11쪽)

어째서 여태 아무도 읽어내지 못했는가. 여기 이 ‘로고스’의 장면이 묘사하는 것은 지옥에서 온 악령이 독일 시문학을 탄생시키는 순간이다. (33쪽)

자기망각적 글쓰기, 거울 단계, 저자성—이것이 시인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기술적 3단계다. 하지만 이 단계들을 기록하려면 책을 능가하는 미디어, 1800년식 기록시스템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디어가 필요하다. 100년 후에는 영화 카메라가 등장해서 책을 모두의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겠지만, 당대에는 책이 여전히 미디어 기술의 최고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중부유럽은 알파벳 학습이 보편화되는 단계에 진입한다. 사회사학자들이 천착하는 통계적 차원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정하는 어떤 프로그램의 차원에서 문해력을 일반화하는 회로가 구성되었다는 말이다. 글쓰기는 더이상 각성이나 집중 같은 식자층 특유의 고행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꿈이나 도취, 또는 어둠 속에서도 계속 쓸 수 있는 단순한 손 기술의 문제가 된다. (196~197쪽)

시는 미학 체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향유한다. 다른 예술들은 각자의 감각적 매체(돌, 색, 건축자재, 떠들썩한 소리 등)에 따라 규정되는 반면, 시의 매체는—언어 또는 소리, 소리로서의 언어, 어쨌든 확실히 문자는 아닌 것으로서—자신의 내용 아래 모습을 감춘다. (199쪽)

이렇게 한 시대의 시가 감각성/관능성을 (두 가지 의미를 통틀어) 모두 저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책이 모든 감각 데이터와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보편적 미디어로 격상된데다가 책을 제외하면 그와 경쟁할 만한 다른 시청각 미디어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1900년 무렵 기술적 저장장치가 침입하여 새로운 기록시스템을 형성하면, 감각성/관능성은 오락산업에 넘겨지고 본격문학은 하얀 종이와 검은 글자밖에 모르는 금욕의 의무를 다하게 될 것이다. (205쪽)

철학은 옛 문예공화국에서 학문 연구의 예비 단계에 불과했지만, ‘정신’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채택하면서 이제 한없이 고귀하지만 한없이 어려운 “전인적 인간”의 문제로 탈바꿈한다. 철학적 저자는 더이상 그저 문자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철학적 수용자는 더이상 그저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271쪽)

시와 철학의 차이는 (실러가 쓴 것처럼) 발화가 저자 개인에게서 나오느냐 아니면 사유의 결과로서 나오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둘의 차이는 이렇게 생겨난 발화들이 제각기 발화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확실해진다. 시인은 자신을 말하고 글쓰게 만든,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여성적 유일자를 소환하기에 자기만의 특이성을 주장하고 사랑을 요구할 수 있다. 반면 철학적 발화는 자기 스스로 복수형의 여성들을 파멸시키고 그녀들의 상실을 초래한다. 그래서 철학은 교육공무원들로 구성된 남성 집단에 한정되며 마지막에야 완전히 인공적으로 구축한 ‘어머니 자연’이라는 이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301쪽)

1800년식 기록시스템은 시체들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시체들에 의거해서 정합되고 시체들을 통해 완결된다. (306쪽)

말하기의 역사적 모험은 연속체도, 그런 형태의 정신사도 아니다. 거대한 불연속이 입을 벌리면서 하나의 기록시스템 전체를 망각에 빠뜨리고, 드높은 고원이—육군과 폭격기 편대들을 집어삼켰던 세계대전의 혹독한 겨울처럼—가로막으며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19세기 독일문학에 고유한 것,” 그 모든 “교양적인 것과 교양을 갖춘 자, 학문적인 것, 가족적이고 선량한 것”이 질스마리아의 여름,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했던 그 짧은 여름과 함께 끝난다. (309쪽)

니체는 여성 독자 기능을 제외한 고전적 기록시스템의 모든 피드백 회로를—알파벳 학습, 주어진 글을 이어쓰는 것으로서의 독서, 저자의 이름 따위를—무자비하게 분석해서 집결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총체적인 결산평가를 진행한 끝에 시스템 전체에 불량품 판정을 내린다. 단어는 작용하지 못한다, 독자가 건너뛰기 때문이다. 독서는 작용하지 못한다, 글쓰기로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름은 작용하지 못한다, 책이라는 사건으로부터 관심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313쪽)

1900년식 기록시스템에서 담론은 [잡음을 생성하는] 난수 발생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잡음의 원천은 정신물리학에 의해 구축되고, 정신물리학적 계측값을 기계장치의 형태로 실행시키는 새로운 기술적 미디어에 의해 저장된다. (359쪽)

1900년식 기록시스템에서 기술적 미디어는 유아의 고유한 언어를 되살리듯이 집단의 고유한 언어들, 지역별 방언들을 복권시킨다. 여기에는 연구 대상의 즐거움보다 연구자의 즐거움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규범화 작용이 중단된 탓에, 이 즐거움은 그전까지 어떤 식으로도 기록될 수 없었던 담론의 민낯을—“새로우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현실의 어떤 지점을”—드러낸다. (408쪽)

과거에는 인간에게 다다른 말이 ‘자연의 담론’이자 ‘담론의 자연’이라 불리는 어떤 심리적 임계점에서 작용했다. 그런데 정신물리학은 이 자연을 전부 제거해버린다. 그래서 뢰네처럼 정신질환자가 된 정신과 의사가 무언가 자신에게 다다르기를 바란다면 다른 미디어로 ‘여행’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426쪽)

개인은 성숙한 ‘말–과–글’로 구성되지만, 정신분석의 개별 사례는 환자의 언어구사 과정에서 방출된 폐기물들을 통해 특수성을 획득한다. 1900년식 기록시스템에서 다른 것들과 혼동되지 않는 독특한 성격이란 모두 익명적 대량생산물을 해체한 부산물로 나타난다. 릴케에 따르면, 두 명의 초등학생이 같은 날 “완벽히 똑같은” 칼을 샀더라도 일주일만 지나면 “그 유사성이 아주 흐릿하게만 남는다.” 무언가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닳게 만든다는 것이다. 산업적으로 보증된 유사성이 손상되면서 개체의 특이성이 나온다. 그리고 이 특이성이 [개체를 파괴시키지 않을 정도의] 경미한 손상에 그친다면, 각각의 병력 또는 사례연구는 다시 공시적 질서로 포섭되어 과학수사 전문가 홈스나 정신분석가 프로이트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490쪽)

정신분석은 여러 여성의 발화를 모아서 유일한 ‘여성’의 원형적 언어를 만들어내는, 번역을 통해 보편에 다다르는 작업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분석의 실천과 이론, 듣기와 글쓰기 속에서 언제나 개별 사례를 에워싸는 데이터의 피드백으로 남는다. 이를테면 도라라는 유명한 여성 히스테리 환자를 다룬 「히스테리 분석 단편」을 보자. “만일” 도라가 이 글을 “우연히 손에 넣는다 해도,” “이미 아는” 내용밖에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괴로운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슐레겔이 받아쓴 여성들의 발화는 소박한 보통 사람들의 철학이었지만, 프로이트가 받아쓴 그녀의 말은 오로지 그녀 자신의 성적 기관들과 기능들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499쪽)

동일한 원천, 동일한 대상, 동일한 성과. 문필가와 정신분석가는 1800년경의 시인과 사상가가 연합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정반대의 결론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문필가는 의사보다 오히려 환자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소설 주인공이 프로이트의 환자들과 똑같은 꿈, 망상의 체계, 히스테리를 공유한다면, 문필가의 무의식 속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환자와 문필가 사이에는 작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으니, 히스테리 환자는 말을 하는 반면 옌젠은 작품을 써서 출판한다. (506쪽)

1912년의 어느 날 저녁,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펠리체 바우어를 처음 만난다. ……카프카는 첫 만남 이후로 몇 주 동안 사무실 타자기 앞에서 시간만 날린다. 그는 타자기를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 사무용품을 오용해서 첫번째 연애편지를 쓴다. 그리고 이 편지들은 펠리체의 입에서 나온 어떤 말의 주위를 계속 맴돈다. ……번개에 맞은 듯한 사랑, 또는 책상을 내려치는 충격. 이름 없는 베를린의 한 신사에 대한 질투, 그러니까 문필가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각종 미디어 연합체에 대한 질투. 여기서 명확해지는바, 이것은 그런 환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630쪽)

‘기록시스템’이라는 단어는 원래 판사회의 의장 슈레버의 편집증적 인식 속으로 신이 속삭여넣은 단어지만, 이 책에서는 임의의 문화에서 유의미한 데이터를 송부, 저장, 처리하는 기술적·제도적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인쇄 기술과 그에 결부된 문학과 대학 제도는 역사적으로 극히 강력한 편제를 이루었으며, 이는 괴테 시대의 유럽에서 문학 연구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이었다. (645쪽)

목차

목차
I1800
학자의 비극. 무대의 서막
파우스트식 도서 사용법 · 해석학으로서의 성서 번역 · 시와 철학 · 성서를 대신한 교양국가 · 시, 악마의 계약, 국가공무
어머니의 입
1800년경의 읽기 공부
어머니들을 위한 기초독본 · 박애주의자들의 알파벳 학습 · 슈테파니의 음성학적 읽기 교습법 · 표준 독일어 · 헤르더의 언어인류학과 ‘아아’ 하는 한숨 · 1800년경 음악과 언어의 기본요소들 · 기초독본이라는 언어의 시작 · 어머니의 읽기 교육을 기억할 가능성
모성과 공무원 조직
어머니들을 위한 페스탈로치의 교육학 · 국가적 모성 · 교사의 공무원화 · 고등교육제도에서의 남성과 여성 · 철학과 여성들에 대한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생각
언어 채널들
번역 불가능성
일반적 등가물의 의미 · 노발리스. 번역으로서의 학문과 시 · 독자 안톤 라이저
「황금 단지」
언어의 시작으로서의 구술적 입문의식 · 아버지가 지도하는 새로운 글쓰기 교육 · 낭만주의의 원형적 글로서의 자연 · 공무원 신화와 도서관 환상 · 알파벳 공부의 에로티시즘 · 무의식의 시인과 미친 공무원 · 1800년경의 시인-공무원 이중생활
저자들, 독자들, 저자들
글쓰기의 도취와 관념고정 · 감각적 미디어의 대체물로서의 시 · 역사적으로 망각된 텍스트들이 시스템에 통합되다 · 저자 기능의 성립
건배의 말
여성 독자의 기능과……
1800년경 익명의 여성 문필가들 · 베티나 브렌타노와 원형적 저자 괴테 · 괴테의 타소, 여성성의 시인 · 시적인 사랑 고백 · 호프만의 히스테리적 여성 독자 · 저자의 증식과 독서의 규제 · 여성들의 읽기 중독 · 시 독본
……신의 왕국
니트함머의 괴테 독본 · 고등교육제도에서의 독일 시문학 · 철학과 대학개혁 · 시인과 사상가의 경쟁 · 시적 정신의 현상학 · 말하기, 읽기, 글쓰기에 대한 헤겔의 생각 · 시인들, 사상가들, 여성들
II1900
니체. 비극의 시작
고전에 대한 니체의 결산평가 · 자동사적 글쓰기의 원초적 장면 · 1900년 무렵의 말 만드는 사람 · 세 가지 미디어: 언어, 음악, 영화 · 니체가 제시하는 기표의 논리 · 시력 상실과 타자기 · 명령하는 니체와 그의 여성 비서들 · 여성들의 귀를 위한 철학
위대한 랄룰라
정신물리학
에빙하우스의 기억 실험 · 1900년경 음악과 언어의 기본요소들 · 모르겐슈테른의 우연적 서정시 · 문화기술과 실어증 연구 · 실어증 환자의 문학 · 청력과 압운 실험 · 타키스토스코프를 이용한 읽기 연구 · 거트루드 스타인의 실험적 자동기술법
기술적 미디어
축음기의 기원들 · 축음기 시와 과학수사 · 축음기 실험에서의 사고비약 · 벤과 치헨의 사고비약 · 벤의 「여행」: 말에서 영화로 · 기술적 미디어와 대중문학 · 자족적 미디어로서의 엘리트문학 · 문자의 정신물리학 · 모르겐슈테른의 타이포그래피 시 · 슈테판 게오르게 서체
리버스 퍼즐
번역 불가능성과 미디어 치환
게오르게의 은밀한 말 저장고 · 개별 미디어의 분석과 조립
정신분석과 그 이면
프로이트의 꿈 해석 기술 · 정신분석 대 영화 · 프로이트의 정신물리학적 전제들 · 분석용 침상 위의 문자들 · 축음기이자 문필가로서의 프로이트 · 문학적 텍스트의 정신분석 · 정신질환적 텍스트의 정신분석 · 슈레버, 프로이트, 플레히지히 · 슈레버를 둘러싼 “기록시스템” · 교양의 종언과 무의미의 쾌락
광기의 시물라크룸
문학과 정신의학 · 문필가와 정신분석가의 경쟁 · 뇌 신경망의 텍스트화 · 릴케의 「근원적 음향」에 나타난 두개골의 음향 기록 ·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 · 글쓰는 문맹자 · 실시간 분석과 재현 불가능성 · 예술교육운동의 자유작문교육 · 우연의 문필가가 정신의 공무원을 대체하다 · 우연의 독자를 위한 우연의 저장장치 · 익명의 문필가 · 역사적으로 망각된 여성 필자들이 시스템에 통합되다
퀸의 희생
『미래의 이브』 · 정신분석과 여성들 · 여성들과 타자기 · 스토커의 『드라큘라』: 타자기에 기초한 흡혈귀 소설 · 엘리트문학과 대중문학의 여성 타자수들 · 카프카의 사랑: 기술적 미디어 · 예술의 경지
후기
주
참고문헌
프리드리히 키틀러 연보
해설: 필자로서의 키틀러
인명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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