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고예상일 안내
주문하신 상품이 한국에서 현지 배송을 위한 출고단계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날짜입니다. 상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출고예상일에 다소 오차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 상품(예약상품포함)을 함께 주문하신 경우 출고예상일이 가장 늦은 날짜에 맞춰 함께 배송됩니다.

ISBN : 9788934972617 / 292쪽 140 x 200 (㎜)
이 상품에 궁금하신점이 있으세요? 1:1상담문의

-
김수진
-
이선민
-
윌리엄 바이넘
-
김용옥
- 25,200
- 31,500
- 14,400
- 18,000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왜 한국사는 세계사인가? 다양성과 객관성의 새로운 한국사를 만나다! 이슬람 성직자 도로는 어떻게 조선에 정착하게 된 것일까? 세계 최대 제국 몽골의 심장부에 불어 닥친 한류의 원조 고려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국 송나라의 도움을 거절했던 고려인들의 자긍심은 어떤 것이었을까? 고려에 망명해온 베트남 왕족 이용상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성계가 야인이던 시절 그를 지킨 27인의 여진족 추장들은 누구일까?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시베리아 코리족 출신일까? 이슬람 속 신라에서 조선 속 몽골까지 한국사 속 세계사, 세계사 속... 왜 한국사는 세계사인가? 다양성과 객관성의 새로운 한국사를 만나다! 이슬람 성직자 도로는 어떻게 조선에 정착하게 된 것일까? 세계 최대 제국 몽골의 심장부에 불어 닥친 한류의 원조 고려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국 송나라의 도움을 거절했던 고려인들의 자긍심은 어떤 것이었을까? 고려에 망명해온 베트남 왕족 이용상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성계가 야인이던 시절 그를 지킨 27인의 여진족 추장들은 누구일까?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시베리아 코리족 출신일까? 이슬람 속 신라에서 조선 속 몽골까지 한국사 속 세계사, 세계사 속 한국사를 입체적으로 통찰하며 한 권에 담은 업그레이드 역사서. 출판사 소개 왜 한국사는 세계사인가? 세계인들과 함께 숨 쉰 5,000년 한국사를 기록한 최초의 책 다양성과 객관성의 새로운 세계사를 만나다 한국사는 단지 한반도와 만주 일부 지역을 지리적 배경으로 하는 사건들이 아니다. 한국사는 엄연한 세계사다. 중국 산둥반도에 산재했던 신라방은 국제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형태였고 쌍화점의 도시 개성에서는 고려 여인들이 아라비아인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었으며 조선시대 궁중 연회에서 코란을 읊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한국사는 삼국통일 후 중국에 남겨진 고구려인의 후예 라후족과 백제 유민들의 고장인 백제향, 파미르고원을 넘은 고선지와 제濟 왕국의 강력한 통치자 이정기의 역사를 포함한다. 이 책 《국경을 넘은 한국사》의 저자 안형환은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복원하고 한국사 속에서 숨 쉬는 세계사를 되살려냄으로써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싶었다고 말한다. 한반도에 터를 잡은 이슬람인들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都老가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 살게 하였다. -《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1월 17일자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都老’. 그는 누구일까? 회회回回는 이슬람인을, 사문沙門은 성직자 집단을 가리키며 도로都老는 이름이다. 즉 조선에 정착한 이슬람 성직자였던 것이다. 이슬람 지역은 신라시대부터 한국과 꾸준한 교류가 있었고 이런 흐름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이슬람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는 11세기 고려다. 《고려사》에는 “현종 15년 9월 대식국의 열라자悅羅慈 등 100명의 상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사가 나온다. 또 정종 6년(1040)에는 “대식국의 상인 보나개保那盖 등이 와서 수은·용치龍齒·점성향占城香·몰약·대소목大蘇木 등 각종 산물을 바쳤다. 그러자 왕은 해당 관원에게 명하여 이들을 객관에 묵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또 이들이 돌아갈 때 많은 금과 비단을 주었다”는 기사를 남기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대식국이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 역사가들도 9세기부터 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846년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의 《도로 및 왕국 총람》에서 신라로 이주한 이슬람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저쪽 감숙甘肅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은 금이 풍부하다. 그곳으로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빠져 영원히 정착해버리곤 한다.” 또한 신라의 선박 돛이 외국으로 수출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서역인은 아마 처용일 것이다. 처용의 처處는 ‘머물다’, ‘살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용容은 ‘담다’, ‘받아들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처용이라는 이름 자체가 ‘머물러 사는 것이 허용된 사람’을 의미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처용의 생김새가 심목고비深目高鼻, 즉 눈이 쑥 들어가 있고 코가 높다고 기록하여 아랍계 사람일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경주의 괘릉에 있는 무사상 역시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마 인물형 토기에 묘사된 무사도 코가 우뚝 서 있고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다. 상상 속의 인물을 조각한 것은 아닐 테니 아마도 주위에 있던,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을 이었을 것이다. 이는 상당수의 서역인들이 신라 조정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끊임없이 이어졌던 이슬람과의 교류는 한국 문화와 과학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세종 때 이순지 등이 만든 세계 최고 수준의 역법서 《칠정산七政算》은 아랍 역법인 회회력回回曆을 토대로 하여 원주각을 360도로 표기하고 있으며 장영실의 만든 물시계 자격루 역시 이슬람의 물시계에서 자동 시보 장치를 따왔다. 세계 최대 제국에 불어 닥친 한류, 고려양 13~14세기에 몽골제국은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유럽에서 고려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대규모의 인적, 물적 교류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 등을 강요하지 않는 지배 방식 덕분에 몽골제국 안에서는 여러 민족이 공존할 수 있었다.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에서 시작된 길은 전 세계 어느 곳으로도 통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고려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인들이 개방적인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고려는 알려진 것처럼 극심한 내정간섭을 받기도 했지만 몽골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문화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14세기 세계 최대 제국 원元에서는 고려양高麗樣이라는 한류 바람이 불었다. 원나라 말기에 궁중에서 일하는 여인 가운데 절반가량이 고려 여인이었고 몽골 귀족들 사이에서 고려 여인을 부인으로 맞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들을 통해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일부 고려 여인들은 중국 대륙을 넘어 인도, 중앙아시아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 충렬왕 24년(1298) 6월 마팔아국馬八兒國의 왕자 패합리唄哈里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은사모銀絲帽와 침향, 베 등을 바쳤다. 마팔아국에서 고려에 선물을 보낸 것은 왕자비가 고려 사람인 채인규蔡仁揆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지식인들도 대거 몽골로 향했다. 이곡李穀, 이색李穡, 빈우광賓宇光 등은 원나라 과거에 합격해 원의 관료로 일했으며 보우普愚, 천희千熙, 혜근惠勤 등의 승려들은 몽골에서 사원의 건립과 중수, 불경 편찬 등의 일을 맡았다. 고려의 금속활자 역시 몽골로 흘러들어갔다가 이곳에서 이슬람 상인에 의해 서아시아나 유럽으로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 술인 소주는 원나라를 통해 고려로 들어왔다. 아랍에서 발명된 증류 방식의 술 제조법이 몽골을 통해 전래됐는데 이 증류주를 몽골어로 아라키亞刺吉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개성 지방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부른다. “중국에게 도움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베이징에서 반경 1,000킬로미터 내에 중국어를 나라말로 쓰지 않는 민족은 오직 우리뿐이다. 중국은 근세 150년을 제외하고는 인류 문화의 최선두에 서 있었던 나라, 언제나 지구 전체 GDP의 1/4 이상을 차지해왔던 국가 이상의 국가였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중국에 맞서 동화되지 않고 반만 년 동안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중국과의 대외 교류사를 보면 뜻밖에도 사대 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를 목격할 수 있다. 7세기에서 9세기까지 당 제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 선진국이자 초강대국이었다. 그런데 신라는 이런 초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했고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나당전쟁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어낸 국제적 감각의 산물이었다. 669년 9월 중국의 서쪽 변방에서 일어난 토번 제국이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타림 분지를 공격했다. 이는 당의 서부와 중앙아시아 지역 지배권에 대한 도전이었고, 자칫하면 당나라가 무너질
시베리아 바이칼호수에 알흔섬이 있다. 이 섬은 코리족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황소가 하늘에서 내려 온 백조를 부인으로 맞아 11형제를 낳았는데 이들로부터 코리족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 코리족의 한 분파가 바이칼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해 코리→고리→고려(고구려를 본래 고려라고 부른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나 《양서梁書》에서는 주몽을 “북이北夷(동이東夷가 아님을 주목하자) 고리국槁離國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청淸대 한자 대사전이랄 수 있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고려의 ‘려麗’를 ‘리’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또 이 지역에서는 명사수를 투멘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주몽(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과 발음이 비슷하다. 현재 바이칼호수 동쪽에는 몽골족의 한 분파인 부르야트족이 살고 있다. 혹자는 이 부르야트가 부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부르야트인들은 사먼을 지칭하는 아르바이Arbai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r 발음이 약화돼 아바이Abai로 부르기도 한다. 또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구스라고 한다. 바이칼 인근에는 솔론Soklon족이 있는데 이들과 한민족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또 인근에는 오랑키족도 있다.
-<한민족의 시원을 간직한 바이칼호수>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중국 운남성云南城 서남부, 미얀마 서북부와 태국 북부, 라오스 서북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라후족〔拉祜族〕이다. 라후족은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고, 닭을 옆에 두고 결혼식을 올리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등 고구려와 유사한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이 입는 옷이나 몸에 하는 장신구 등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들도 명절 때면 우리처럼 색동옷을 입는다. 식생활에서도 음식물을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먹고, 채소를 소금으로 절인 후 물로 씻어내고, 밥을 으깨 넣어 발효시켜 먹는다.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는 “라후어는 문장을 이루는 낱말의 배열 순서가 주어+보어+술어로 한국어와 일치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라후어 ‘너레 까울리로 까이베요’는 ‘너는 한국으로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너레’의 ‘너’는 우리말 ‘너’와 형태가 아주 비슷하다. 또한 ‘레’는 북한 사투리 ‘내레’의 레처럼 주격 조사로 볼 수 있다. ‘~로’ 역시 ‘서울로’, ‘광주로’와 같은 움직임의 방향을 나타내는 우리의 격조사와 형태나 기능이 같다. ‘까이’도 우리말 ‘가다’와 뜻과 발음이 유사하다. ‘까울리’는 중국이나 태국 등지에서 ‘고구려’나 ‘고려’를 뜻하는 말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라후족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감숙甘肅와 청해靑海 지역에 살았던 민족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청해성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병사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따라서 라후족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에 잡혀갔다가 오지에 버려졌던 고구려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높다.
-<라후족, 백제향, 그리고 고선지와 이정기>에서
당시 거란과 맞서고 있던 송나라는 공교역에서 고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송이 고려로 보내는 이른바 사여품賜與品이 고려가 보내는 조공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무역 역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고려가 송에 수출한 물건은 금·은 기구, 화문능라花文綾羅, 세저細苧(세모시), 생포生布, 인삼, 표피豹皮(표범 가죽), 해표피海豹皮(바다표범 가죽), 백지白紙, 향유, 화문석, 나전螺鈿, 장도, 지紙, 필筆, 묵墨, 부채 등으로 다양했다. 송에서 수입한 물품은 의대衣帶, 말안장, 채단綵緞, 칠갑漆匣, 옥玉, 물소 뿔, 금·은 기구, 금박金箔, 차, 향료, 약재, 자기, 서적, 악기, 화폐 등이었는데 중국산이 아닌 것도 많았다. 서남아시아산 물건이 송나라를 통해 고려로 들어온 것이다. 이 교역에 대해 소동파蘇東坡는 “우리가 받은 조공품은 노리개 같은 불필요한 물품인데 백성들이 고생하며 번 돈으로 그것들을 사고 있다. 고려 사절단이 가져온 물품들이 시장을 어지럽힌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또 “고려의 교활한 상인들이 아무 때나 조공을 핑계로 들어와 중국을 소란케 한다”며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司馬光 같은 이들도 실익 없는 고려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중국의 지식인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린 것을 보면 무역 역조 현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 같다.
-<대식국 상인이 드나들었던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 벽란도>에서
13~14세기에 몽골제국은 ‘팍스 몽골리카(몽골 지배하의 세계 평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유럽에서 고려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인류 역사상 전에 없는 규모의 인적, 물적 교류를 촉진시켰다. 또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 등을 강요하지 않는 몽골의 지배방식 덕분에 몽골제국 안에서는 여러 민족이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 공녀제는 조혼 풍조를 확산시키는 등 고려의 전통사회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한편 몽골 귀족 사회에는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풍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원나라 말기에 궁중에서 일하는 여인 가운데 절반가량이 고려 여인이었고 몽골 귀족들 사이에서 고려 여인을 부인으로 맞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을 통해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계 제국 몽골의 심장부에 한류 바람이 분 것이다. 일부 고려 여인들은 중국 대륙을 넘어 인도, 중앙아시아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충렬왕 24년(1298) 6월 마팔아국馬八兒國의 왕자 패합리唄哈里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은사모銀絲帽와 침향, 베 등을 바쳤다. 마팔아국은 인도 코로만델 해안에 있는 작은 나라로 면포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 마팔아국에서 고려에 선물을 보낸 것은 왕자비가 고려 사람인 채인규蔡仁揆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번영을 이룬 고려 말의 세계화>에서
세종 초기의 기록을 보자. 특히 기록에 나오는 도로都老라는 인물이 흥미롭다. 그는 태종 때 처음 조선에 들어온 듯하다.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가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 살게 하였다(《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1월 17일자)”. 도로는 수정을 채취해 여러 물건을 만들어 바쳐 왕의 신임을 받았고 왕은 그에게 전국의 수정을 캘 수 있도록 허용했다. 무슬림 도로는 《조선왕조실록》에 항상 회회 사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문은 일반적으로 성직자 계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도로는 당시 조선에 있었던 무슬림 공동체에서 종교 지도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전통 의식 보존에 대해 묵시적인 동의를 받아 토착 문화와 별다른 갈등 없이 15세기 초 조선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궁중 의례에까지 정기적으로 초청받아 참석했다. “다음으로 승려 및 회회인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判通禮가 꿇어 엎드려 예를 마쳤다고 아뢴다. 통찬通贊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 9월 27일자).” 당시 궁중 연회에 참석한 무슬림들은 그들 고유의 의식으로 축하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코란을 낭송하며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는 궁중에서 코란이 읊어지던 시대였다.
-<회회 사문, 유구국, 베트남… 귀화한 외래 성씨들>에서

목차
들어가는 말
제1부 당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8세기 신라
1. 8세기 최고의 문화 선진국
2. 일본 천황을 속인 동아시아의 상인
3. 선박의 돛을 아랍에 수출했던 해양 강국
4. 빈공과 합격자 90명 중 80명이 신라 유학생
5. 측천무후의 존경을 받았던 승려 원측
6. 무슬림과 쌍벽을 이룬 디아스포라, 신라방
7. 해양 철기 세력 탈해왕과 절강성에 산재한 신라 지명
8. 흉노 김일제에서 시작된 김씨 왕족
9. 처용과 무슬림들이 넘나들던 세계 도시 서라벌
10. 티베트와 당나라의 대립을 이용했던 나당전쟁
11. 라후족, 백제향, 그리고 고선지와 이정기
제2부 한국사상 가장 역동적이었던 11세기 고려
1. 바다를 거점으로 전 세계에 코리아를 알리다
2. 후주에서 여진까지 고려로 귀화한 이민족들
3. 대식국 상인이 드나들었던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 벽란도
4. 쌍화점의 도시 개경과 송상들
5.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던 고려 여인들
6. 송과 거란 사이에서 펼친 등거리 외교
7. 동쪽에 솟는 붉은 해, 고려인의 문화적 자긍심
8. 중국에서 천태종의 교본을 저술하는 고려 승려들
9. 자주적 천하관을 가진 황제의 국가
10. 금나라의 시조는 고려인이었을까?
11. 고구려보다 더 넓었던 동북쪽 영토
12. 강동 6주, 그리고 27년에 걸친 14번의 전쟁
13. 조선의 번영을 이룬 고려 말의 세계화
제3부 개방과 실험으로 최전성기를 이룬 15세기 조선
1. 과학기술 강국 조선과 쇄국 체제의 아시아
2. 조선의 관직과 녹봉을 받은 여진족 추장들
3. 회회 사문, 유구국, 베트남… 귀화한 외래 성씨들
4. 신기전, 명나라를 능가했던 화포 제조 기술
5. 원대의 동력과 아라비아의 자동 시보 장치가 결합된 자격루
6. 중국과 아랍을 벗어난 자주적인 천문학 체계, 칠정산
7. 국제적인 문자 연구의 결과물, 훈민정음
8. 130일의 출산휴가와 세계 최초의 여론조사
제4부 한국사 속의 세계인 리더들
1. 7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를 읽은 세계인, 김춘추
2. 바다 상인의 개방과 포용 정신, 왕건
3. 세계 권력에 가장 가까웠던 교양인, 충선왕
4. 이민족을 친구처럼 아우른 군왕, 이성계
맺는 말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