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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5022039 / 266쪽 160 x 233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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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앤루니스 리뷰
우리는 항일구국을 위해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다
대한국인이라면 가장 많이 듣고 부른 노래 애국가
애국가는 일제강점기 3ㆍ1운동 현장에서 불리며 항일구국이라는 이념을 실천했다. 이렇게 획득한 민족적 합의를 어떤 이유로든 손상해서는 안 된다. 분단 이전 민족 구성원 모두가 부른 애국가는 민족 대통합을 위해 오늘도 절실히 필요하다. 상하이 임정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동지에게 김구는 “우리가 3․1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반문했다. 여전히 유효한 답변이다. 걸핏하면 북은 남을 위협하고, 남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볼 수밖에 없는 단어가 ‘종북’인 현실이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과연 애국가는 작사자 미상인가.
개정 또는 제정 주장은 타당한가.
통일 후 국가(國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의 작사자를 밝히고자 최남선 외 전문가들에 의한 위원회를 결성했고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를 펴냈다. 그리고 이 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명기했다. 60년 전의 결론이다. 사실일까?
이제 광복 7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애국가에 ‘안익태 작곡’이라고만 돼있다. 작사자의 성명은 없다. 정부는 애국가를 누가 작사했는지를 숨기고 있다. 이 책은 그래서 나왔다.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우리는 항일구국을 위해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다 대한국인이라면 가장 많이 듣고 부른 노래 애국가 애국가는 일제강점기 3ㆍ1운동 현장에서 불리며 항일구국이라는 이념을 실천했다. 이렇게 획득한 민족적 합의를 어떤 이유로든 손상해서는 안 된다. 분단 이전 민족 구성원 모두가 부른 애국가는 민족 대통합을 위해 오늘도 절실히 필요하다. 상하이 임정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동지에게 김구는 “우리가 3.1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반문했다. 여전히 유효한 답변이다. 걸핏하면 북은 ... 우리는 항일구국을 위해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다 대한국인이라면 가장 많이 듣고 부른 노래 애국가 애국가는 일제강점기 3ㆍ1운동 현장에서 불리며 항일구국이라는 이념을 실천했다. 이렇게 획득한 민족적 합의를 어떤 이유로든 손상해서는 안 된다. 분단 이전 민족 구성원 모두가 부른 애국가는 민족 대통합을 위해 오늘도 절실히 필요하다. 상하이 임정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동지에게 김구는 “우리가 3.1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반문했다. 여전히 유효한 답변이다. 걸핏하면 북은 남을 위협하고, 남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볼 수밖에 없는 단어가 ‘종북’인 현실이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과연 애국가는 작사자 미상인가. 개정 또는 제정 주장은 타당한가. 통일 후 국가(國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의 작사자를 밝히고자 최남선 외 전문가들에 의한 위원회를 결성했고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를 펴냈다. 그리고 이 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명기했다. 60년 전의 결론이다. 사실일까? 이제 광복 7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애국가에 ‘안익태 작곡’이라고만 돼있다. 작사자의 성명은 없다. 정부는 애국가를 누가 작사했는지를 숨기고 있다. 이 책은 그래서 나왔다. 출판사 리뷰 모르는 척, 자꾸 시간만 흐른다. 국사편찬위윈회는 ‘기타 참고사항’으로 “1955년 5월 13일자 본 위원회 주관 하에 애국가작사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작성한 애국가 작사자 조사 자료를 보고한 바 있음”이라고 부연했다. 이들 공문을 찾아낸 애국가 연구의 권위자 김연갑 상임이사는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면서 “두 공문은 1955년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견지하고 있으나 작사 시점을 1907년으로 상정한 것, ‘윤치호설이 유력하나’라고 쓴 것은 첫 조사 17, 19년 후 업데이트된 부분”이라고 짚었다. 특히 “1972년 ‘미상’이 2년 뒤 ‘단언하기 어려움’이라고 바뀐 것은 사실상 윤치호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풀이했다. 미당 서정주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내용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으로 처리한 배경에는 대통령이 윤치호 작사로 밝혀지면 친일을 험 삼아 애국가를 고치자고 할 터이니 그대로 미상으로 하라고 했다는 미당 서정주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당시 문교부 장관의 발언을 뒤로하고, 국사편찬위원회를 거수 기구로 만든 절대 권력의 존재이다. 짐작되듯이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다. 백낙준이 윤치호에게 애국가 작사자를 물은 적이 있다. 윤치호는 자신의 서명이 든 찬미가를 보내는 것으로 답을 했다. 14년 전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자료도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증명한다.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간한 신한민보 1910년 9월 21일자에 「국민가 윤티호」로 애국가 4절 전문을 실었다. 연합신문, 1955년 4월 26일 기사 애국가 작사자가 곧 판명될 단계에 이르렀다.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의뢰받은 후 1주일 간 광범위한 조사를 하고 있던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하면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는 기록상으로 윤치호 씨 설이 가장 유력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증거로서는 다른 사람은 기록상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극히 애매한 주장임에 반하여 윤치호 씨는 ①자신의 친필이 있다는 것. ②1948년 시절 10월 9일자 동아일보 문화난의 박은용 씨의 ‘자기가 보관 중인 1907년 찬송가집(윤치호 작) 속에는 윤치호 작 애국가가 기록되어 있다’는 논문을 들고 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애국가의 글을 적은 윤치호 씨의 글을 감정해본 결과 1907년에 쓴 것은 아니지만 해방 후에 윤치호 씨가 쓴 친필임이 확증되었다. 책속으로 추가 “애국가란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노래다. 국민의 통일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노래다. 그러므로 그 국가를 듣고도 아무런 감동이 없는 자는 귀머거리가 아니면 혈맥에 흐르는 피가 다른 이민족일 수밖에 없다. 그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잠시나마 숙연해진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 나라의 경찰관일지언정 이민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경 그들도 그 순간이나마 우리가 자기들의 적이 아니라, 그런 노래도 부를 줄 아는 체내에 흐르는 피가 같은 동족이요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슨 위대한 터득이라도 한 듯이 희한해 했는지도 모른다.” _[139쪽]에서 임시정부와 해외 교민사회 그리고 국내에서의 애국가는 다양한 기능과 성격과 용도로 불렸다. 임시정부에서는 국가 대신, 해외 교민사회에서는 독립과 항일 의지를 담아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로 불렸다. 이 시기에 애국가는 획기적인 성격 변화와 새로운 위상을 얻게 된다. 바로 안익태에 의한 새로운 곡조로의 전환과 충칭 임시정부의 신곡조 채택이다. 임시정부와 해외 교민사회의 합으로 국가에 준해 부르게 된 것이다. _[251쪽]에서
한 나라의 역사와 이념을 가사와 선율로 드러냄과 동시에 그 민족의 역사와 민족성 그리고 미래상까지 반영한 국민적 노래가 국가(國歌)다. 국가를 부르는 행위를 통해 국민들은 민족 정서에 공감한다. 이념을 일체화시켜 연대감과 동질감을 맛본다.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유대를 공유한다.
_<015쪽>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남산 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가을하날 공활한대 그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이 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질거우나 나라사랑하세….
_<025쪽>에서
윤치호는 1945년 9월 사망 직전 가족에게 남긴 자필 ‘가사지’ 말미에 작사 연대를 1907년이라고 밝혔다. 윤치호의 직접 진술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결국 애국가는 애국 계몽 시대인 1890년대에 싹이 터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민중의 선택으로 3·1운동 기간에 불린 것이다. 여느 나라의 국가와 달리 밖(외적)을 의식하지 않고 안에서의 애국을 강조한 노래였다. 평화 애호적이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상제는 우리황제를 도우사’나 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노랫말이 그렇다. 일부 노랫말이 호전적인 다른 국가(國歌)들과 딴판으로 애국가는 평화를 스스로 외치고 있다.
_<026쪽>에서
1928년 4월 27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애국가를 부른 교사와 학생 대표가 검속당한 기록도 있다. “신입생 환영회를 마친 후 다과회를 시작할 때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창가를 일동이 불렀는데, 이 창가는 본래 조선 애국가로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야 그 사회자이든 전기 김형규 씨를 구인하고 엄중한 취됴를 하는 중 지난 2일은 동교 학생회의 수명을 증인으로 심문하였다더라.”(평양)라고 돼있다. 당시 경찰은 요시찰 대상 학교의 신입생 환영회까지도 사찰한 것이다.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를 ‘조선××’(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탄압했다.
_<034쪽>에서
1951년 세계 국가(國歌)만을 모은 미국적십자사의 ‘내셔널 앤섬스-앤드 하우 데이 케임 투 비 리튼’ 역시 작사가로 윤치호를 지목한다. 미국, 한국, 영국, 오스트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 7개국 국가(國歌)의 작사·작곡 배경을 다룬 책이다. 22~23쪽에서 저자 E R 그리피스는 ‘TONG HAI MAIN(동해바다)’이라는 제목 아래 애국가 1, 2절 영어 가사와 후렴을 싣고 작사자를 ‘Chiho Yun’(치호 윤)이라고 알렸다.
_<034쪽>에서
‘애국가(작사 윤치호·작곡 안익태)’라고 명기하는 것이 힘든가. 무슨 천기누설일까. 우리나라 유일의 국립 사료편찬기관이자 한국사 연구기관, 우리나라 역사 정보의 총본산을 자부하는 국사편찬위
원회의 수수방관이 불가사의다. 애국가를 안 부르는 자생적 빨갱이들을 탓할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다. 애국가 예절 중에는 ‘애국가의 곡조에 다른 가사를 붙여 부르거나, 또는 곡조를 변경하여 불러서 애국가의 존엄성을 손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조항이 있다. 교육부는 이를 가르칠 자격이 없는 듯하다.
_<065쪽>에서
혜문 스님은 ‘이 문서는 애국가를 작사한 1907년이 아니라 1945년 9월 작성됐지만, 일단 유력한 작사자가 스스로 밝힌 문서라는 점에서 애국가 작사가 규명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특기했다.
_<078쪽>에서
작사자에 대한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반(反)윤치호 세력의 저의가 의심스러운 공동작설 출현을 경계할 따름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자동판매기식 발표 저널리즘의 맹점이 윤치호를 내리고 안창호를 올리는 폐해를 낳고 있다는 점을 특기하겠다. 이상화가 소치 동계올림픽 현장에 울려 퍼진 애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애국가가 나오면 그냥 감동이 밀려와요.” 한국인의 정서이다. 윤치호와 안익태, 친일 듀오라며 눈을 부라리기에는 애국가가 품고 흘러온 고난과 보람의 역사는 너무도 먹먹하다.
_<087쪽>에서
“애국가란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노래다. 국민의 통일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노래다. 그러므로 그 국가를 듣고도 아무런 감동이 없는 자는 귀머거리가 아니면 혈맥에 흐르는 피가 다른 이민족일 수밖에 없다. 그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잠시나마 숙연해진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 나라의 경찰관일지언정 이민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경 그들도 그 순간이나마 우리가 자기들의 적이 아니라, 그런 노래도 부를 줄 아는 체내에 흐르는 피가 같은 동족이요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슨 위대한 터득이라도 한 듯이 희한해 했는지도 모른다.”
_<139쪽>에서
임시정부와 해외 교민사회 그리고 국내에서의 애국가는 다양한 기능과 성격과 용도로 불렸다. 임시정부에서는 국가 대신, 해외 교민사회에서는 독립과 항일 의지를 담아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로 불렸다. 이 시기에 애국가는 획기적인 성격 변화와 새로운 위상을 얻게 된다. 바로 안익태에 의한 새로운 곡조로의 전환과 충칭 임시정부의 신곡조 채택이다. 임시정부와 해외 교민사회의 합으로 국가에 준해 부르게 된 것이다.
_<251쪽>에서
목차
책을 열며/애국가 작사자의 성명이 없다
1章
오늘 부르는 이 노래
과연 애국가는 작사자 미상인가
이것은 민중의 선택
수난기, 순결ㆍ비장한 나라사랑
2章
미상이라니?
작사자는 윤치호
역사 연구에 일대 획을 긋는 사료 발굴
모르는 척 40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책임져라
3章
애국가 작사자도 모르는 정부
베일에 싸인 해괴한 상황이 반백년
증거 발굴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정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최초 발굴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 아니다
애국가와 안익태, 뭉클한 두 이름
애국가 작사자, 엉뚱한 번지수 긁어 부스럼
‘애국가, 윤치호 친필 맞다’ 오래 전 검증필
4章
불순한 음모를 경계한다
애국가를 들으면 눈물이 글썽
애국가 작사자 ‘미상’ 아닌 ‘미결’
애국가는 윤치호 작사, 최고 증거 첫 발굴
애국가란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노래
친일 윤치호, 자살했나
애국가는 많다
안익태, 누가 그를 폄하하는가
못마땅하니 새로 만들자고?
장준하 \"듣고도 아무 감동 없는 자\"
終章
사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허구①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허구②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허구③
확정할 수 있는 근거 8가지
부록_1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 작사자 조사’ 기간 관련 보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기간, 신문과 잡지는 관련기사를 통해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에서 김인식으로, 다시 최종 윤치호로 확정돼 가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록에서는 1955년 4월부터 7월까지 총14편을 수록했다.
부록_2
애국가의 역사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여러 가지 증거를 찾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록_2는 또 다른 설명이기에 중복이 있다.
역사적 전개와 성격 변화 과정
제1기 전사 시대
제2기 애국가 시대
제3기 국가 대용 시대
제4기 국가 준용 시대
제5기 국가 공인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