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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요 선사의 체험으로 풀어내다 - 상

강설 선사 설우스님 저 | 조계종 | 2014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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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5800171 / 376쪽 149 x 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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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선원장급 스님의 체험으로 풀어낸 조사 간화선의 요지 『선요』 강설서 조계종출판사에서 발간한 도서 『선요, 선사의 체험으로 풀어내다』는 지난 6월에 발간한 도서『무비 스님의 증도가 강의』에 이은 조사어록의 발간이다. 조사어록은 수행가풍을 중시하는 조계종의 종지에 부합하는 소의 경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발간의미가 크다. 설우 스님의 『선요, 선사의 체험으로 풀어내다』는 ‘무심과 평상심, 깨달음과 보살만행, 정과 혜, 지혜와 자비’라는 관점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어, 자칫 편견과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수행의 문제를 균형과 조... 선원장급 스님의 체험으로 풀어낸 조사 간화선의 요지 『선요』 강설서 조계종출판사에서 발간한 도서 『선요, 선사의 체험으로 풀어내다』는 지난 6월에 발간한 도서『무비 스님의 증도가 강의』에 이은 조사어록의 발간이다. 조사어록은 수행가풍을 중시하는 조계종의 종지에 부합하는 소의 경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발간의미가 크다. 설우 스님의 『선요, 선사의 체험으로 풀어내다』는 ‘무심과 평상심, 깨달음과 보살만행, 정과 혜, 지혜와 자비’라는 관점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어, 자칫 편견과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수행의 문제를 균형과 조화로 승화시키고 있다. 특히, 설우 스님은 선원장급 스님으로서 지난 40여 년의 수행과 현장체험을 바탕으로 『선요』를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더욱이 『선요』에 대한 역해서는 더러 발간되었으며, 몇몇 스님에 의해 강의는 있었으나 주요 본문 내용에 대해 그 전거를 밝히고 수많은 예화와 비유를 통한 강설서의 발간은 최초의 일이다. 『선요, 선사의 체험으로 풀어내다』는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수행지침서이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큰 지남이 될 것이다. 조사선과 간화선의 요지를 밝힌 최초의 강설서 『선요』는 참선수행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실참실오(實參實悟)하는 조사선과 간화선의 요체를 설해 놓은 것으로, 과거 전통강원의 이력과목 중 사집(四集)의 한 과목이기도 하다. 이 책 『선요, 선사의 체험으로 풀어내다』에는 개당보설(開堂普說)을 시작으로 양산화상에게 답한 편지 등 모두 29편의 법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봉어록 상권의 내용 72편 가운데에서 발췌한 것이다. 예로부터 『선요』의 대지(大旨)를 분대지 투현관(奮大志 透玄關)이라 말해 왔다. 이는 큰 뜻을 세워 분발하여 조사현관 곧 화두를 타파하라는 말이다. 『선요』 서문의 첫 문장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參禪은 雖以不立文字하며 不假修證으로 爲宗이나 然이나 旣可參則必有要라’ ‘참선(參禪)은 문자를 세우지 않으며 닦아 증득함을 빌리지 않음을 종지로 삼는다. 그러나 이미 참구(參究)한다면 반드시 요점이 있다.’ 선은 본래 닦아 증득함을 빌리지 않음을 종지로 삼는다는 것은 조사선의 가풍을 뜻한다. 또한 참구한다는 것은 간화선의 가풍을 이야기 한다. 『선요』는 조사선과 간화선의 요긴한 수행 지침서라 할 수 있다. 고봉 스님은 간화선의 요긴한 수행지침을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그물에 벼릿줄이 있으며, 옷에 옷깃이 있는 것과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 들어서 곧바로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물코가 그물 아닌 것은 아니지만 벼릿줄을 버리고 그물코만 들면 그물이 반드시 펴지지 않고, 여러 실오라기가 옷 아닌 것은 아니지만 옷깃을 버리고 실오라기를 들면 옷은 펴지지 않는다.’ 따라서 『선요』는 영가(永嘉) 스님이 말씀하신 ‘잎을 따고 가지를 찾는 일을 나는 하지 않는다’와 같이 참선 수행의 요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선요』는 고봉 스님이 간화선 화두 수행을 실참하고 깨달으신 체험을 바탕으로 간화선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수행지침서라 할 수 있다.

저자 소개

고봉 스님
고봉 스님은 1238년에 출생했다. 속성은 서씨(徐氏)이고 휘는 원묘(原妙)이다. 고봉(高峰)이라 스스로 불렀고 사람들은 고불(古佛)이라고도 일컬었다.
열다섯 살에 밀인사의 법주 스님에게 출가하여 이듬해 삭발하고 1년 뒤에 구족계를 받는다. 20세까지는 주로 천태교학을 공부한다. 그러다가 생멸심(生滅心)을 끊을 수 있고 중생심을 벗어나 부처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선종(禪宗)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물한 살에 선지식을 찾아 헤매다가 정자사에 머물고 있는 단교묘륜화상을 찾아간다.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첫 번째 깨닫는 계기가 되어 깊은 지견이 열렸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즉 서른네 살에 확철대오한다. 
고봉 스님은 이후 16년간 삼관을 내걸고 제자들을 제접한다. 1295년 세수 58세, 법랍 43세에 입적한다.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來不入死關(래불입사관) 去不出死關(거불출사관) 
鐵蛇鑽入海(철사찬입해) 
撞倒須彌山(당도수미산) 
와도 사관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 
가도 사관을 벗어나는 일이 없네. 
쇠로 된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 
수미산을 쳐 무너뜨리도다. 
설우 스님은 1971년 대한불교조계종에 입산하였으며 제방선원에서 35안거를 성만했다. 승가고시위원, 승가청규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기본선원 교선사이며 청주 법인정사에 주석하고 계신다.
스님은 실참을 통해 깨달음을 직접 체험하시고 대중선을 주창하시며 저잣거리에서 생활선과 보살만행을 펼치고 계신다. 특히, 스님은 수행과 보살행, 지혜와 복덕이 둘이 아님을 몸으로 보여 주시고 있으며, 노인복지, 소년소녀가장 돕기, 독거노인 돕기, 도시락배달불사 등 밝은 깨침의 등불을 자비실현으로 회향하고 계신다.

머리말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괴로울 때에는 꿈을 깨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꿈을 깨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한 일인가? 본래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 또한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괜히 꿈을 꾼 사람이 꿈을 꿔서 깨쳤다고 하는 것이지,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은 그런 것이 귀할 리 없다. 이 모든 일들이 중생 업식을 가지고 중생 업식을 깨치는 일이다. 마치 도적의 칼을 뽑아서 도적을 잡는 일과 같다.
조사선과 간화선의 본래 뜻은 부처가 부처로서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선禪에 대한 정견正見 없이 참선하는 무리들은 ‘참선은 선법문禪法門 듣는 자리나 선방에서만 닦는다’고 생각하고 생활선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일찍이 육조 스님은 『단경壇經』에서 ‘일상생활 속의 그 많은 경계들이 본래 공空한 것인 줄 알고 그대로 잘 알아서 집착심에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잘 쓰는 것[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선禪이라고 했고, 고봉 스님은 『선요禪要』에서 ‘본래 모두 성불해 있으므로 굳이 닦아서 깨닫는다면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올리는 것과 같이 군더더기일 뿐’이라고 일렀다.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는 참선 공부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필독서로서 우리나라 조사선의 전통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봉 스님은 자신의 수행 과정을 토대로 쓴 이 책에서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알고 믿음·분심·의심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 정진하면 누구나 반드시 깨침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조사선과 간화선의 바른 정견正見을 갖추게 되면 일상생활에서의 분노, 갈등, 걱정을 끊어 버리고 본래 맑고 고요한 자리로 돌아가게 되므로 말 그대로 생활 속의 선을 실천하게 만드는 공부라 할 것이다.
간화선 공부라 하면 무조건 접근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불자들이 많다.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법을 펴기 위해 비유와 방편을 활용하셨듯이, 이 책에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상에 기초한 비유를 통해 간화선 수행체계를 쉽게 풀이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앎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지난해 말 생각지 못하게 몸이 상하게 되었다. 신라 고승 경흥 스님의 일화에 ‘선우善友가 병을 낫게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소납 역시 여러 도반과 불자님들의 염려와 도움 덕분에 기운이 돌아왔다.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몇 달간 회복에 힘쓰던 중 오래전 정리해 두었던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 원고를 다시 꺼내어 들었는데 매일의 규칙적인 운동과 원고작업으로 몸과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 사람들과 나누게 되었으니 모든 공덕을 그대 살아 있는 부처님들에게 회향한다.

불기 2558년 여름 저잣거리에서 설 우

책 속에서

“참선(參禪)은 문자를 세우지 않으며 닦아 증득함을 빌리지 않음을 종지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선요』의 첫 구절입니다.
서문을 강의하지 않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이 서문의 한 구절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선요』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구절에 우리가 왜 불교를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오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 많은 법을 설하시며 드러내시고자 한 종지도 이 글귀만 잘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상권, 40쪽)

의심은 믿음으로써 체(體)를 삼고, 깨달음은 의심으로써 용(用)을 삼는 줄 알아야 한다. 믿음이 십분(十分)이면 의심이 십분이고, 의심이 십분이면 깨달음이 십분이다.(상권, 347쪽)

선에서는 이것을 ‘근본자리는 모두가 부처님과 똑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엇이 똑같은가? 우리 마음을 쓰는, 작용하는 기능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볼 줄 아시고 들을 줄 아시고, 우리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압니다. 부처님이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드러내는 효능과 우리가 드러내는 효능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능은 똑같은데 효능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공덕성에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공덕과 우리의 공덕에 차이가 납니다. 부처님은 연기로 이 세상을 보고 연기법으로 삶을 사시기 때문에 모든 생명 세계에 행복을 주고 자유로움을 주고 축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공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그대가 나의 생명의 은인이요, 그대와 나의 생명자리가 끊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상권, 44쪽)

불자님들이 수행을 할 때는 첫째, 열심히 경학을 배우고 둘째,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착한 인성이 살아나면서 화두에 대한 의정이 물안개 피어오르듯 자연스럽고 쉽게 올라오게 됩니다. 그때 의정을 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 열이 올라와서 생기는 상기병도 없습니다. 신심이 지극한 사람은 상기병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 없이 화두만 타파하고 견성하면 된다는 의욕만으로 공부를 하면 급한 생각이 들고 상기병도 됩니다.(하권, 34쪽)

이 자리는 우리가 중생심이라는 집착을 깨뜨리고 부처의 세계에서 그 소식을 그대로 드러낸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도라 할 수 있고 안신은 곧 무심(無心)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심은 평상심(平常心)입니다. 비유하자면 무심은 손등이요, 평상심은 손바닥입니다. 손등과 손바닥은 하나의 손입니다. 하나의 손에서의 작용이 하나는 지혜로 드러나고 하나는 자비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둘로 나눌 수가 없고 하나입니다. 무심과 평상심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무심과 평상심은 그 작용이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상심이 드러날 때 무심이 함께 가고 무심할 때 평상심이 함께 드러나는 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상권, 113쪽)

알음알이로 분별 번뇌의 물결을 일으키면서 화두공안의 해답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화두에는 그 해답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중생의 분별심을 넘어서서 절대적인 체험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그 경지를 수용할 뿐이고, 인격적으로 그렇게 생활할 뿐이지, 해답으로써 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고봉 스님이 말씀하신 허공이 부서지고 대지가 내려앉는 체험, 중생심이 완전히 불심의 세계에 들어가 티끌만한 번뇌와 이기심과 중생 업식 모두가 불심으로 전환되어 중생심이 완전히 해체되어버린 경지를 스스로 체험하는 것입니다.(상권, 161~162쪽)

예를 들면 내가 많은 생각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서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제가 이제 확실히 믿고 확실히 깨달았습니다”라고 하자 어머니가 “무엇을?”이라고 물었는데, “제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뭐 대단한 일입니까? 그 말 하는 자체가 눈에 티와 같다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자리에서 볼 때는 견성했다는 것 자체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확실히 체험되어 생활 속에서 인격으로 그대로 보살 부처행을 할 경계를 말하는 것이지, 이치적으로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필요 없는 이야기입니다.(상권, 248~249)

스님들 중에는 산에서 참선에만 전념하는 분들도 계시고, 잠시 포교나 행정을 맡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 있건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심입니다. 부처님과 가르침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수행에 전념합니다. 마치 대문이 그 힘을 의지하는 돌쩌귀와 같습니다. 우리가 대문을 하루에 백 번을 열든지 천 번을 열든지 대문은 돌쩌귀에 의지해서 버팁니다. 대문이 돌쩌귀를 벗어나 버리면 그 문은 두 번도 못쓰고 부서지고 맙니다.
수행승이나 포교승이나 행정승에 대하여 높낮이 분별을 일으킨다든지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두가 일체중생을 위해서, 위로는 부처님의 법을 의지하고 또 자기 앉은 자리에서는 모든 인연을 교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상권, 190쪽)

공부가 좀 덜 됐을 때는 옳고 그른 것이 있고, 시비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고, 더러운 것이 있고, 성인이 있고, 범부가 있는 등 이렇게 분별을 나누고 할 말이 많아지는데, 공부가 제대로 되면 그것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하권, 84쪽)

선방에서만 선이 살아 있고, 일상 가정에서 밥 해 먹고 청소하고 가족과 대화하는 것은 선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선이고, 거기서 살아 있는 선을 해야 하는데 건너뛰어 버립니다. 건너뛰는 것이 심하다 보니까 부부간에 문제도 생기고 가족 간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선 공부는 내 가정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현실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선을 잘하기 위해서 가정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도된 것입니다.(하권, 327쪽)

이것은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왜 공부하느냐? 일상생활에서 나도 행복하고 가족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하고, 그 힘이 더 커지면 사회에 참여하고 이렇게 법을 잘 쓰고 마음을 큰 틀에서 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하권, 329쪽)

우리는 보통 환경이 달라지면 내가 바뀌고, 사회가 좋아지면 내 살림살이도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밖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내 생활, 행복감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릅니다. 세상이 바뀌어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선은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하권, 369쪽)

목차

머리말.7
서문_ 선은 부처님의 마음, 교는 부처님의 말씀.13
고봉 화상 행장.27
고봉 화상 선요서.35
선요발.51
1. 개당보설.73
2. 대중에게 보임.167
3. 직옹 거사에게 보임.211
4. 결제에 대중에게 보임.233
5. 대중에게 보임.243
6. 해제에 대중에게 보임.259
7. 대중에게 보임.267
8. 기한을 정해서 대중에게 보임.299
9. 대중에게 보임.305
10. 저녁법문.329
11. 신옹 거사에게 보임.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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