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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9222083 / 160쪽 148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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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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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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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여운
- 10,800
- 19,800
- 10,800
- 16,920
- [시리즈] 실천문학의 시집(실천시선) [141]
출판사 리뷰
§. 편집자가 꼽은 전기철의 시
여자 투우사
소나 돼지가 반체제 인사라도 되는 듯
날마다 땅에 파묻고 격리시키고
망명자 행세를 하는 개들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이 바보 같은 사회에서
서정시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노래방에서 밤새 일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몇 푼어치의 위안인가?
아침이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폐가가 허물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무엇인가?
오빠, 나한테 인간이 되라고 하지?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종말론자야.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는 거야. 영혼을 모두 돈에 팔아버렸거든. 밤은 나의 대륙이고 나는 종말의 박물관이야.
나는 홀로 우체통처럼 빨개져서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부렁대는 시계를 바라보며 서정시 같은 말을 뱉는다.
너에게 시집을 보낼게. 네 밤을 지켜줄 거야.
오빠, 시가 밥 먹여줘? 오빠도 알지. 내 꿈이 투우사라는 거. 커다란 경기장에서 카포테를 들고 서 있는 투우사 말이야. 여자 투우사!
누이는 자신의 대륙에 홀로 서서
그런데 오빠, 밤마다 야근을 하는 달은 시급이 얼마나 될까?
나 같은 년의 아픔 때문에 지구가 무거워지면 안 되는데……. 그치, 오빠!
그 순간
투우사의 칼이
나의 시
한복판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한여름 밤의 꿈
세상은 마법에 걸렸어요.
이스라엘 사람 유리 겔라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밤
모두들 티브이 앞에서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쓰다듬듯이
숟가락을
밥 먹는 숟가락의 고개를
부러뜨리는 밤
그 한여름 밤에
나는 알바에서 잘려 행복에 시달리며
동물원으로 표범을 보러 갔어요.
그 한여름 밤에
모두들 숟가락을 부러뜨리는 밤에
동물원의 담을 넘었어요.
먼 아프리카의 꿈을 만나러
한여름 밤에
숟가락을 구부리는
한여름 밤에
세상의 담을 넘었어요.
유리 겔라가 숟가락을 부러뜨리는 밤에
아프리카의 밤을 만나러 갔어요.
숟가락들이 부러지는 밤에
세상의 담을 넘었어요.
어머니는 아직도 배추를 다 팔지 못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밤에
발해의 말 장수
전쟁이 끝났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어머니는 귀환병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묻지 않았고
담배를 불침번으로 세우고는
세잔의 사과처럼 아무 데나 퍼질러 앉았다.
아버지의 이름 위로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모든 사물들은 우리를 외면했고
새들도 나날이 뻔뻔스러워졌다.
어머니는 외로움과 친구가 됐고
나는 권태를 발명했다.
내 유일한 위로는 밤하늘의 시리우스였는데,
밤이면 시리우스를 데리고 먼 곳까지 갔다가
새벽에야 돌아오곤 했다.
별이 뜨지 않는 밤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한 상이군인이 마을에 나타났다.
휘파람을 불며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낡은 가방에 넣고 다니는 행상이었다.
어머니와 내가 고요를 머릿속에 채우고
누워 있으면
그 군인의 악기가 울었다.
나는 발해의 말 장수라네.
수많은 전쟁을 지나 국경을 넘은
발해의 말 장수라네.
두만강을 건너 아무르 너머
발해의 말 장수라네.
어머니는 외로움을 안은 채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고
나는 말 장수의 악기가 내 심장을 연주하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두려움을 모르면 어른이 되지 않아.
두만강 건너 아무르 너머
말을 달리면
안개 자욱한 초원이 있다네.
외로운 이여,
내 왼쪽 가슴에 난 창문을 열어
청동 말을 타고 가면
꿈꾸는 발해가 있다네.
나는 발해의 말 장수
세상을 건너는 말 장수
神道로 말을 달리는 발해의 말 장수
안개를 데리고 다니는
발해의 말 장수
두려움을 모르면 어른이 되지 않아.
나는 방을 뛰쳐나갔다.
하늘에서 찬란하게 짖고 있는 시리우스가
금세 나를 데리고 먼 발해로 달려갈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발해의 말 장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휘파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혼몽한 밤안개 사이로
밤새 짖어대던 시리우스
茶山은 왜 요한을 배반했을까
다산은 왜 신을 배반했을까. 다산초당을 다녀온 후 이 생각이 내 영혼의 영토를 점령했다. 밥을 먹으려면 식칼 냄새가 나고 화장실에 가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라고 씌어 있어 뒤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쫓기듯 나온다.
다산, 아니 요한은 왜 유배지에서라도 다시 신을 찾지 않았을까. 바람이 몇 장의 하늘을 걷어낸 계절 속으로 들어가보면 달이 도는 소리인지 지구가 도는 소리인지 시간의 소음이 요란하다.
요한, 아니 다산이 신을 배반한 영혼의 길은 곡선일까 직선일까. 다산의 자취를 따라가면 견고한 성도 있고 초막도 있고 절도 있고 성당도 있는데 다산이 신을 배반한 영혼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꼭 밥 한 그릇 다 비우고 말리라. 낙원동 악기상가 아래 홍명희의 ‘화요회’ 터에서 떠돌고 있는데 배고픈 간판들이 우두커니를 내려다본다. 머릿속에는 세상에서 버려진 것들로 가득하고 거울을 보면 비애로 화장을 한 낯선 얼굴이 빤히 쳐다본다.
허공은 점점 짙게 색칠되는데 인사동과 낙원동 어름에서 불이 켜진 식당은 보이지 않는다. 배고픔을 달랠 곳을 찾지 못한 채 걷고 걷다가 길을 잃고 먼 곳을 바라보니 저만치 어둠 속 다산의 뒷모습이 어렴풋하다.
권태
생각의 뼈다귀를 쌓는 밤. 책이 한 관념론자를 편다. 어머니의 치매가 와 있다. 기억의 밑바닥이 수런거린다. 목구멍에서 침을 핥는 어머니. 방부 처리된 기억의 저편에서 온 어머니, 파랗다. 파란 어머니는 책을 기절시킨다. 관념으로 그을린 밤. 페이지 속으로 들어온 관념론자가 절뚝인다. 책 속에 치매를 쌓는 밤. 관념론자가 어머니의 치매 속에다 글을 쓴다. 치매에 걸린 책. 초침 위에 권태를 쌓는 관념론자의 밤. 파란 밤. 어머니가 목구멍에서 마지막 침을 핥는 밤. 적막이 그을린다.
목차
제1부
여자 투우사
한여름 밤의 꿈
발해의 말 장수
플라타너스
키치
풀 하우스
풍금
광주
작은 새, 나의 작은 새여
불행해서 기뻐요
약 아이
부러진 봄
마왕
누이의 방
어느 자해공갈단의 고?백
낙원시장 89호 금이네 집
휴전선 편지
제2부
강물에 써놓은 말들
천 개의 도시
죽음과 소녀
법주사의 밤
타르코다르 1
타르코다르 2
시인의 영토
수다쟁이 햄릿
몽유병자
침묵
피튜니아
굿모닝 충무로
여름 가족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茶山은 왜 요한을 배반했을까
눈의 변주곡
권태
제3부
슬픈 피에로
태풍
눈 오는 밤
브레히트를 읽는다
떡갈나무의 나라는 어디쯤 있을까
목련
버스 정류장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
나사로의 언덕
양철 지붕의 재잘거림
르누아르
오랑캐꽃
바그다드 카페
새의 초상화
해설 우대식
시인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