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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전기 류영모와 그의 시대

박영호 저 | 교양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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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1799769 / 680쪽 153 x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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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류영모의 사상은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獨立不懼). 류영모의 생애는 세상에 숨어 시름이 없었다(遯世無悶). 독립불구의 독창적인 사상이라 알아주는 이가 적었고, 둔세무민의 생애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가 평생을 바쳐 다석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게 된 숨은 동기가 여기에 있다.” 박영호, 머리말에서 일평생 진리를 좇아 큰 깨달음에 이른 대사상가,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에 두루 통달하여 동서회통의 구경각을 이룬 다석 류영모의 삶과 사상 2008년 7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 “류영모의 사상은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獨立不懼). 류영모의 생애는 세상에 숨어 시름이 없었다(遯世無悶). 독립불구의 독창적인 사상이라 알아주는 이가 적었고, 둔세무민의 생애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가 평생을 바쳐 다석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게 된 숨은 동기가 여기에 있다.” 박영호, 머리말에서 일평생 진리를 좇아 큰 깨달음에 이른 대사상가,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에 두루 통달하여 동서회통의 구경각을 이룬 다석 류영모의 삶과 사상 2008년 7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 함석헌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소개된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류영모는 동서 사상과 천문 지리에 능통한 대석학이었고, 우리 말과 글로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큰 깨달음에 이른 대자유인이었다. 젊어서 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뒷날 《반야심경》을 때마다 외울 정도로 불교의 가르침에 심취했고, 어려서 《맹자》를 읽고 각성한 뒤로 유학과 노장을 깊이 탐구하여 동양 사상의 대가로 통하였다. 특히 《중용》을 좋아하여 직접 우리말로 옮기고 후학들에게 여러 차례 강의했다. 일생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었으며, 예수를 삶의 모범으로 삼아 진리에 헌신했다. 그는 동서 사상을 회통시켜 대통합을 이룬 구경각의 대사상가였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15살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1910년 20살 때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이때 기독교를 전파하여 일제 강점기에 오산학교가 기독교 운동의 중요한 인물들을 길러내는 계기를 이루었으나 정작 류영모는 이 무렵에 톨스토이를 읽으며 정통 기독교 신앙에 의심을 품었다. 또한 불경과 《노자》를 접하면서 성경만을 진리로 받들고 예수를 절대화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1년 만에 돌아왔다. 농사지으며 살고자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에게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철학 강의를 하였다. 이때 졸업반이었던 함석헌을 만났다. 함석헌은 이때 받은 충격을 “나의 일생 동안 정신적으로 단층을 이루며 비약한 때가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류영모 선생을 만났을 때”라고 표현했다. 종교, 철학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보여준 류영모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문일평 등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1928년부터 35년 동안 YMCA 연경반에서 동서 사상을 강의했다.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 김흥호 같은 이들은 다석을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다. 단순하고 소박한 금욕의 삶을 살고자 했던 류영모는 50살 무렵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항상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얇은 잣나무판 위에서 생활하고 잠도 그 위에서 잤다. 새벽 3시면 일어나 명상을 한 후 일기를 썼다. 그 일기를 모은 《다석일지》는 그가 쓴 유일한 저술로 남았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45살 때 북한산 밑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았다. 나이를 햇수로 세지 않고 날수로 하루하루 세었는데, 33,200일을 살았다. 류영모의 직제자 박영호의 땀과 혼이 밴, 단 하나의 다석 전기 《다석 전기》는 류영모의 직제자인 박영호가 스승의 생전에 구술을 받고,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남긴 《다석 일지》를 필사하고, 여러 지인을 만나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펴낸 유일한 다석 전기이다. 1985년에 초판이 출간된 이래로 두 차례의 개정판이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세 번째 개정판인 이 책은 그동안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을 더하고, 잘못된 기록들을 바로잡았으며, 옛말 투의 문장과 한자말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었다. 진리를 찾는 젊은이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4살 때 천자문을 떼었고, 6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자치통감》을 배웠다. 10살부터는 소학교에 다녔는데, 훗날 류영모는 서당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산수를 배우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고 추억했다. 1902년부터 다시 서당에 다니기 시작한 류영모는 서당에서 《맹자》를 배웠다. 류영모는 《맹자》를 좋아하였으며, 좋아한 만큼 깊이 영향을 받았다. 류영모는 《다석일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의 정신은 모세와 예수, 그리고 공자와 맹자로 영향된 것입니다.”(61쪽) 1905년, 15살이던 류영모는 YMCA 초대 총무였던 김정식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선교사 게일이 운영하던 경신학교에 다녔다. 그 무렵 교육으로 조국을 구하자는 안창호의 주장에 감화되어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은 경신학교 교장 밀러에게 오산학교에서 근무할 과학 교사를 구해달라고 청하였다. 류영모가 경신학교 학생일 때 직접 과학을 가르쳤던 밀러는 단번에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류영모를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1910년, 20살이던 류영모는 오산학교에 선생으로 가게 되었다. 류영모는 약 2년 동안 오산학교에서 과학 교사로 지내면서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남강 이승훈에게 기독교 사상이 없었다면 3ㆍ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독교를 대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산학교에 기독교 사상이 없었다면 주기철, 김주항, 한경직, 함석헌과 같은 종교인들을 배출할 수 없었을뿐더러 오늘 우리가 아는 오산학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910년에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 류영모의 공로는 지대하다.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안창호가 점화한 오산학교의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은 예수의 진리 정신과 사랑 정신으로 승화되어 더욱 빛났다. - 3장 ‘오산학교 교사’ㆍ129쪽에서 오산학교에서 동료 교사로 만난 이광수와는 후에 이웃사촌이 되어 만년에도 사귐을 계속하였다. 류영모는 이광수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과 인연을 맺었고, 최남선이 발행한 잡지 〈소년〉에 글을 싣기도 하였다. 류영모는 민족 사학자 호암 문일평과도 교유하였는데, 류영모와 문일평이 만난 것은 최남선이 세운 출판사 신문관에서였다. 당시 신문관에는 이 나라 최고 지성과 수재들이 모여들어 수준 높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고 유·불·선에 능통했던 문일평은, 비록 2살 아래이지만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불·선에 통달한 류영모의 넓은 학식을 일찍이 알아보고 마음으로 경외하였다. 1912년, 오산학교 과학 교사를 그만둔 류영모는 일본 도쿄에 유학을 가서 대학교 예비 과정인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6월까지 공부했다. 당시 일본에서 재일본 YMCA 총무를 맡고 있던 김정식은 한국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할 때 우치무라 간조를 강사로 자주 초빙하였다.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를 주창했으며, 함석헌, 김교신 등에게 영향을 끼친 기독교 사상가이다. 류영모도 여러 번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을 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정통 신앙을 떠났던 터라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유학한 지 채 1년이 안 되어 더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돌연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류영모가 대학에 가지 않은 이유를 그의 말로 짐작해본다. 대학, 대학

저자 소개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4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3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다석 마지막 강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 《잃어버린 예수》《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목차

목차
1부 진리를 찾는 젊은이(1890~)
1장 어린 시절
진리의 사람 - 톨스토이, 간디, 류영모 | “나는 상놈이다.”
죽음 앞의 어린 시절 | 4살, 천자문을 떼다
소학교 입학 | 맹자를 벗으로 삼다
2장 기독교를 만나다
일본어를 배우다 | YMCA와의 첫 인연
연동교회 시절 | 경신학교에서 배우다
19살, 선생이 되다
3장 오산학교 교사
이승훈과 안창호의 만남 | 오산학교 과학 선생
여준, 신채호와의 만남 | 오산학교에 기독교를 전파하다
큰 사람 남강 이승훈 | 오산학교의 빛나는 별들
4장 도쿄 유학
톨스토이를 사숙하다 | 20살, 불경과 《노자》를 읽다
일본 유학생 | 도쿄에서 만난 조만식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을 듣다
2부 기독교 밖의 기독교인(1915~)
5장 단독자
결혼에 대한 생각 | 편지로 성사된 혼인
첫날밤 행방불명 | 3남 1녀의 아버지
최남선, 이광수와의 교유| 농부를 꿈꾸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부모 | 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우다
6장 오산학교 교장
부친,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다
잿더미에서 부활한 오산학교 | 조만식의 후임 교장
철학자 교장의 기행 | 맹귀우목의 인연, 함석헌
7장 비정통 기독교인
하루를 일생처럼 살다 | YMCA 연경반 강의 35년
내 말은 이 세상에 쓸모가 없다 | 김교신과 〈성서조선〉
비정통 선언
3부 동서회통의 사상가(1928~)
8장 죽음 앞의 묵상
농부가 되고 싶은 사업가 | 수의 신비
이승훈과 류명근의 죽음 | 김정식을 추모하다
호암 문일평의 죽음 | 류영모를 스승으로 삼은 김교신
9장 농사짓는 은둔자
북한산 기슭으로 들어가다 | 이웃사촌 춘원 이광수
숨어 사는 즐거움 | 죽음과의 싸움
52살에 얻은 깨달음 | 김교신을 위해 쓴 깨달음의 글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 ‘나’가 죽어야 얼이 산다
10장 금욕의 삶
일일일식(一日一食)의 삶 40년 | 방 가운데 만리장성을 쌓다
잣나무 널판 위에서 앉고 자다 | 류영모의 건강 유지법
11장 ‘성서조선 사건’
창씨개명을 피한 지혜 | ‘성서조선 사건’으로 구속되다
검사가 머리를 숙이다 | 감옥에서 느낀 자유
일제에 무릎 꿇지 않은 이들 | 김교신의 죽음
4부 구경각을 얻은 현자(1943~)
12장 나는 우주인이다
북악산에서 천지인 합일을 깨닫다
우리는 지구호를 탄 우주여행자
다석을 아호로 쓰다 | 1945년, 은평면 자치위원장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이유
13장 스승과 제자
정신의 아들 함석헌 | 십자가 신앙을 버린 함석헌
무교회 지도자의 오해 | 맨발의 성자 이현필
무학의 성인 이세종 | 토착 수도 공동체 동광원
이현필이 떠난 후
14장 우리 말글 속의 하느님
말 한마디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
한글은 씨알을 위한 글자다 | 한글 놀이, 한글 철학
여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다
《노자》와 《중용》을 완역하다 | 반야심경을 외우다
천부경의 수수께끼를 풀다 | 결별의 기도를 다시 옮기다
15장 동족상잔의 포화 속에서
2만 2천 일 기념식 | “상웅이, 자네는 내 아들이야.”
지극히 청빈한 삶 | 서울에서 6ㆍ25를 겪다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다
나라를 구할 것인가, 평화를 지킬 것인가
정치는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는 것
5부 얼을 가르치는 스승 (1955~1981)
16장 죽음 연습
“나는 1년 뒤 오늘 죽을 것이다.” |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몸은 비눗방울 같은 것 | 죽음의 종이 되지 마라

17장 진리의 스승
스승을 닮으려 한 함석헌 | 70살 제자를 꾸짖다
벗이여, 아주 갔는가 | 참회의 눈물 흘린 함석헌
무등산에서 살고 싶다 | 빛고을 광주와의 인연7
제자 김흥호, 서영훈 |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하다
35년 만에 끝난 연경반 강의 | 아들 자상의 귀거래
18장 얼나로 솟나다
70살, 죽음을 실습하다 | 3만 일을 살다
87살에 톨스토이처럼 가출하다 | 죽음을 기다리다
꺼져 가는 의식의 촛불 | 91년의 몸옷을 벗다
없이 계신 하느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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