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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

쇼팽 발라드 제4번 캄피엘로 문학상 수상작

원제 : Presto Con Fuoco (1995)

로베르토 코트로네오 저 | 최자윤 역 | 북캐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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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6836735 / 350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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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파란의 역사 속에 감춰진 쇼팽의 비밀과 사랑을 좇다”
움베르트 에코가 극찬한 장대한 음악 역사 미스터리
-캄피엘로 문학상 수상작품-


모나리자와 견줄 수 있는 세기의 걸작 쇼팽의 ‘발라드 제 4번 바단조 작품번호 52’는 두 가지 버전이 존재했다. 쇼팽이 숨겨진 연인에게 바친 미발표 자필 악보는 조르주 상드와 수많은 사람들을 농락하고 격렬한 시대의 흐름 속에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되는데…….
20세기 말, 스위스 산중에 은둔 생활을 하는 노회한 피아니스트가 죽음을 앞에 두고 지난 생애를 회상한다. 피아니스트 거장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떠올리게 하는 화자인 '나' 마에스트로는 1978년 파리에서, 망명한 러시아인의 추적을 받게 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상상도 못한 채 그에게서 쇼팽이 죽기 직전에 쓴 수수께끼의 자필악보를 받게 된다. 그것은 ‘발라드 제4번 바단조 작품번호 52번’의 또 다른 종결부로 쇼팽이 마지막으로 사랑한 연인을 위해 만든 곡이었다. 쇼팽의 악보 속에서, 그리고 그 악보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화자인 ‘나’는 그의 예술과 인간에 대한 숨겨진 감정을 완성한다.

이 책은 쇼팽의 정념이 담긴 미발표 악보를 둘러싼 기구한 운명과 격렬하게 불타올랐던 그의 사랑 속에서 화자인 ‘나’의 지난 세월과 사랑이 오버랩 되며 독자들을 심연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도록 만든다. 음악의 매력과 모험의 흥분을 결합시킨 유일한 소설이다.

저자 소개

쇼팽을 상대할 때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것도 상당히 눈물겨운 인내 말이다. 이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도 있고 나처럼 단지 그런 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21세기가 앞으로 5년밖에 남지 않은 이 세상에서 피아니스트는 정신이 이상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두 가지 부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정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을 명확히 밝혀내는 일,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 두 장의 다른 악보를 가리키는 일 이외에는 말이다. 내가 콘서트에서 발라드 제4번을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때의 일이 되살아난다. 1975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렸던 콘서트는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콘서트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많은 관중들이 왔고, 변함없이 환성과 갈채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목이 아파 기진맥진해 있었다. 나는 프로그램을 자세히 검토했다. 리스트, 드뷔시, 모차르트, 바흐의 토카타, 그리고 가장 마지막이 쇼팽이었다. 콘서트를 마무리하기 위한 앙코르곡으로 그 곡을 연주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곡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마지막까지 연주를 끝마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뵈젠도르퍼사의 늠름한 피아노로 연주했는데, 그 피아노는 스타인웨이사의 피아노가 가진 부드러움이 조금도 없었다. 모차르트나 바흐를 연주하기에는 완벽했고 리스트를 연주하기에는 자극적이었으나 드뷔시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쇼팽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강철 현을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 도구 안에는 길이가 약 3미터에 달하는 현까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처음에 음 두 개를 울려본 것만으로 내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확실히 무언가 잘못돼 있었다. 나는 물론 그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청중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다장조의 첫머리가 그 자체 안에서 상실의 감각을 잉태하고 있었을 줄은….
-본문 페이지 20-21


쇼팽만큼은 모든 것이 다 알려진 작곡가입니다. 사라져버린 작품이나 젊은 날의 습작까지 포함해서 모조리 다 알려진 작곡가 중 한 사람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에스트로, 이번에 당신이 한 말에는 저의 흥미를 끄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말도 안 되는 가짜를 팔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점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의 악보를 당신이 볼 수 있게 된다면 제가 바로 당신이 계시는 파리로 갈 테니까요. 그땐 당신도, 저도 실수할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이번 일의 경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저의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즉, 도대체 위작은 왜 저희가 알고 있는 인쇄판과 다른 것일까요? 대체 누가 쇼팽의 위작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을까요?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 자는 누구일까요? 이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더욱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와 같은 위작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만큼 위험한 도박은 없으니까요. 단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선지와 오선지도 구별하지 못하는 수집가에게 가서, 발라드 제4번의 진짜 자필악보의 사보(寫譜)를 파는 편이 낫지요. 저라면 당신 같은 명연주가에게 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처럼 쇼팽의 악보를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고, 전 세계에 전문가 친구들이 있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당신은 쇼팽의 위작 같은 것을 별 어려움 없이 구별해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마에스트로, 한 가지만 더 말해두겠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필이면 왜 발라드 제4번일까 하는 점입니다. 1800년대에 쓰인 모든 작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피아노곡입니다. 그것도 가장 복잡한 작품이지요. 대체 어째서 위작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어째서 당신에게 마주르카 같은 훌륭한 작품을 제시하지 않았을까요? 곡은 짧고 간단하며, 게다가 호소하는 부분까지 포함돼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작품 68번 다음에 작곡된 마지막 곡이라도 괜찮습니다. 아니, 마에스트로. 이쯤에서 저희는 명확히 해두어야만 합니다. 대체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는 러시아인이 유럽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주소 하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친애하는 마에스트로, 저조차도 당신이 지금 파리에 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의 시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꽤 좋은 것이지요. 조금 피워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습니다.” 
                                                                                  -본문 페이지 133-134



나는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예의 음표들을 한 눈에 훑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예의 중단되어졌던 화음들에 먼저 도달해야만 했다. 그것은 발라드의 결론이 될 것이라고 생각됐지만 사실은 반대로 종결부의 서곡이었다. 그 시점에서 잠시 멈춰 섰다. 콘서트 도중도 아니고, 녹음실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곤 음표들과 그 위에 이어진 자그마한 원을 바라보았다. 뭐라 말하면 좋을까. 너무나도 불규칙해서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악보였기 때문에 악보를 덮을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쇼팽이 몇 개의 화음 위에 잇단음표를 그리려다 만 흔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두 번이나 표시를 남겨놓은 것처럼 더 두꺼운 펜촉으로 더 진한 잉크를 묻혀서. 그러나 이것은 그저 지나친 추측일 수도 있다. 페이지를 넘기자 거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거의 읽어낼 수 없었고 고통과 비슷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센 강 어귀에서 나를 덮쳐온 꿈과 같은 것이었다. 피아노에서 일어나 가벼운 현기증을 털어내려고 창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곤 여느 때보다 한층 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 주변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센 강은 흘러 떨어지는 폭포처럼 보였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있는 두 개의 첨탑은 물을 퍼 올리는 수차의 양 날개 같았다. 에펠탑마저도 거대한 강철로 된 추처럼 흔들렸고 별들은 우주선처럼 멀어져갔다. 나는 이런 풍경들도 곧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도 곧 사그라질 것이라는 것과 모든 행동들이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도. 이윽고 나는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가 그 페이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악보가 모사본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펜 끝의 흔적 때문이 아니라 더 강하고 제대로 기록된 음표들이나 조금씩 비뚤거리는 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듯한 8분 음표, 거기에 기록된 음표들은 쇼팽 자신이 직접 적은 것이 틀림없었다. 피아노 보면대에 기대어 고통을 참으며 적어 내려간 것이다. 양 팔을 뻗어 한 쪽 손엔 머리를 기대고 한 쪽 손은 건반에 두어 화음을 찾아가며 아르페지오와 음표를 기록하다 처음에는 왼손으로, 그 다음엔 오른손으로, 그리고선 양손으로. 그리고 그렇게 두 손으로 연주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의 악절을 정정해가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마구 휘갈기며 지운 곳들도 있는가 하면 종이의 가장자리에 덧붙인 것도, 바꾸어 쓴 곳도 몇 군데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쟁이 끝난 뒤의 흔적과도 같아 그 엄청난 악보 중 한 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렸을 적 내가 좋아해 자주 치던 악보와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고서 손에 들었던 천편일률적으로 기록된 음표들이 나란히 인쇄되어 있는 악보 같은 것도 아니었다. 음표가 많든 적든 나에게는 악보가 세상의 전부였다.
                                                                                  -본문 페이지 237-238


그 소녀는 누구였을까? 저는 아직도 그 소녀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제 다리는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져간 그 소녀를 쫓아갈 수 없었습니다. 대체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중에 어머니께 여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 근처 어디에서도 제 또래의 금발머리 소녀가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꿈이나 환영, 아니면 유령이라도 본 것이겠죠.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쇼팽이 정열의 필적으로 악보를 써내려갔을 때 느꼈을 우수(憂愁)의 감정과도 같은 것이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이 악보들을 옮겨 적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음표들을 아무리 완전한 교양체로서 옮겨 적는다한들 말이죠. 저는 그날 본 그 환영을 도무지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여전히 그날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곡들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고 이것을 적은 손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무성하게 우거졌던 자연의 장소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 다시 그 길로 돌아가 보려 하면 그 잔디도, 식물들도 금세 다른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에스트로, 아무도 우리에게 이런 싸움에서 이겨낼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니, 어쩌면 제 말이 조금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날 오후 제 눈앞에 나타났던 그 금발머리 소녀가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까요? 아마 정열이 묻어나는 우수(憂愁)에 대해 제가 아무리 논한다 한들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겠죠. 인생에서 그저 갓길에 피어 있는 한 무더기의 풀숲과도 같을 것입니다. 제 인생에 정열의 풀숲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뭐가 될까요? 저에게도 사랑했던 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다시 생각할 때마다 저는 그저 전부 잃을 뿐이었습니다. 쇼팽은 그의 솔랑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두 번 다시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없었을까요? 아마도 그랬겠죠. 
                                                                                   -본문 페이지 265-267


갑자기 나는 제임스가 말했던 그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제4번 발라드의 종결부가 얼마나 정열적이며 격노와 불가능과 그의 숙명까지 담고 있는 것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분명한 관능과 당황스러움까지도. 그 마주르카가 제임스의 모든 것이자 상실이었다. 또한 우수였으며 나중에 후회하기 위해 순간을 살지 않는 것에 대한 기쁨, 그 직후에 밀려드는 감각의 동시성의 작은 상실이었다. 나는 이제야 솔랑주를, 창문을 보고 앉아 있는 나의 솔랑주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른 나의 몸을, 이 노인의 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내 눈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머리를 벽에 기대고 있는 솔랑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녁이 데리고 온 바람결에 그녀의 황금빛 머리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알았다. 그것이 젊은 날의 한순간이라는 것을. 그 속에는 제임스도 있었고 나도 있었다. 그 속에는 우수도 존재했고 정열도 존재했다. 마치 서로 부딪히며 싸워대는 두 파도처럼 서로의 요소들을 잘 버무리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었다. 그 순간 내 인생이 바단조의 음악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환영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그 밤에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는 것과 그리고 우연에 맡겨진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가는 이야기들을 그런 식으로 하나로 엮어내는 일이야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인간들의 특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는 코드를 통해 세계를 풀어내고 하나의 언어를 끌어내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문자를, 그리고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문자를 해독해보이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안네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그녀의 관능을 떠올렸고 갑자기 내 몸쪽으로 다가온 솔랑주의 몸을 또 다시 느끼고 있었다. 
                                                                                 1961년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토리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문예평론가. 오랫동안 주간지 <에스프레소> 문화섹션에 ‘금서목록’이라고 하는 비평을 연재해왔다. 이 책 <쇼팽 발라드 제 4번 바단조>는 그의 소설 데뷔작이다. 특히 이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견줄만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탈리아 캄피엘로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제 2의 움베르토 에코로 불러지고 있다. 
저서로는 <E nemmeno un rimpianto. Il segreto di chet Baker>, <ECO; Due Tre Cose Che So Di Lui>, <ETA Perfetta>, <Letters to my Son on the Love of Books>, <Otranto; Romanzo>, <Per Un Attimo Immenso Ito>, <Dimenticato Il Mio Nome; Romanzo> 등이 있다.


 


 

역자 소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이탈리아어를 전공했으며,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책 속에서

쇼팽을 상대할 때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것도 상당히 눈물겨운 인내 말이다. 이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도 있고 나처럼 단지 그런 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21세기가 앞으로 5년밖에 남지 않은 이 세상에서 피아니스트는 정신이 이상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두 가지 부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정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을 명확히 밝혀내는 일,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 두 장의 다른 악보를 가리키는 일 이외에는 말이다. 내가 콘서트에서 발라드 제4번을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때의 일이 되살아난다. 1975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렸던 콘서트는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콘서트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많은 관중들이 왔고, 변함없이 환성과 갈채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목이 아파 기진맥진해 있었다. 나는 프로그램을 자세히 검토했다. 리스트, 드뷔시, 모차르트, 바흐의 토카타, 그리고 가장 마지막이 쇼팽이었다. 콘서트를 마무리하기 위한 앙코르곡으로 그 곡을 연주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곡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마지막까지 연주를 끝마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뵈젠도르퍼사의 늠름한 피아노로 연주했는데, 그 피아노는 스타인웨이사의 피아노가 가진 부드러움이 조금도 없었다. 모차르트나 바흐를 연주하기에는 완벽했고 리스트를 연주하기에는 자극적이었으나 드뷔시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쇼팽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강철 현을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 도구 안에는 길이가 약 3미터에 달하는 현까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처음에 음 두 개를 울려본 것만으로 내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확실히 무언가 잘못돼 있었다. 나는 물론 그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청중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다장조의 첫머리가 그 자체 안에서 상실의 감각을 잉태하고 있었을 줄은….
-본문 페이지 20-21

 

쇼팽만큼은 모든 것이 다 알려진 작곡가입니다. 사라져버린 작품이나 젊은 날의 습작까지 포함해서 모조리 다 알려진 작곡가 중 한 사람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에스트로, 이번에 당신이 한 말에는 저의 흥미를 끄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당신에게 말도 안 되는 가짜를 팔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점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의 악보를 당신이 볼 수 있게 된다면 제가 바로 당신이 계시는 파리로 갈 테니까요. 그땐 당신도, 저도 실수할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이번 일의 경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저의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즉, 도대체 위작은 왜 저희가 알고 있는 인쇄판과 다른 것일까요? 대체 누가 쇼팽의 위작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을까요?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 자는 누구일까요? 이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더욱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와 같은 위작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만큼 위험한 도박은 없으니까요. 단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선지와 오선지도 구별하지 못하는 수집가에게 가서, 발라드 제4번의 진짜 자필악보의 사보(寫譜)를 파는 편이 낫지요. 저라면 당신 같은 명연주가에게 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처럼 쇼팽의 악보를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고, 전 세계에 전문가 친구들이 있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당신은 쇼팽의 위작 같은 것을 별 어려움 없이 구별해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마에스트로, 한 가지만 더 말해두겠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필이면 왜 발라드 제4번일까 하는 점입니다. 1800년대에 쓰인 모든 작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피아노곡입니다. 그것도 가장 복잡한 작품이지요. 대체 어째서 위작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어째서 당신에게 마주르카 같은 훌륭한 작품을 제시하지 않았을까요? 곡은 짧고 간단하며, 게다가 호소하는 부분까지 포함돼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작품 68번 다음에 작곡된 마지막 곡이라도 괜찮습니다. 아니, 마에스트로. 이쯤에서 저희는 명확히 해두어야만 합니다. 대체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는 러시아인이 유럽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주소 하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친애하는 마에스트로, 저조차도 당신이 지금 파리에 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의 시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꽤 좋은 것이지요. 조금 피워보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습니다.” 
-본문 페이지 133-134


나는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예의 음표들을 한 눈에 훑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예의 중단되어졌던 화음들에 먼저 도달해야만 했다. 그것은 발라드의 결론이 될 것이라고 생각됐지만 사실은 반대로 종결부의 서곡이었다. 그 시점에서 잠시 멈춰 섰다. 콘서트 도중도 아니고, 녹음실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곤 음표들과 그 위에 이어진 자그마한 원을 바라보았다. 뭐라 말하면 좋을까. 너무나도 불규칙해서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악보였기 때문에 악보를 덮을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쇼팽이 몇 개의 화음 위에 잇단음표를 그리려다 만 흔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두 번이나 표시를 남겨놓은 것처럼 더 두꺼운 펜촉으로 더 진한 잉크를 묻혀서. 그러나 이것은 그저 지나친 추측일 수도 있다. 페이지를 넘기자 거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거의 읽어낼 수 없었고 고통과 비슷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센 강 어귀에서 나를 덮쳐온 꿈과 같은 것이었다. 피아노에서 일어나 가벼운 현기증을 털어내려고 창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곤 여느 때보다 한층 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 주변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센 강은 흘러 떨어지는 폭포처럼 보였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있는 두 개의 첨탑은 물을 퍼 올리는 수차의 양 날개 같았다. 에펠탑마저도 거대한 강철로 된 추처럼 흔들렸고 별들은 우주선처럼 멀어져갔다. 나는 이런 풍경들도 곧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도 곧 사그라질 것이라는 것과 모든 행동들이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도. 이윽고 나는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가 그 페이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악보가 모사본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펜 끝의 흔적 때문이 아니라 더 강하고 제대로 기록된 음표들이나 조금씩 비뚤거리는 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듯한 8분 음표, 거기에 기록된 음표들은 쇼팽 자신이 직접 적은 것이 틀림없었다. 피아노 보면대에 기대어 고통을 참으며 적어 내려간 것이다. 양 팔을 뻗어 한 쪽 손엔 머리를 기대고 한 쪽 손은 건반에 두어 화음을 찾아가며 아르페지오와 음표를 기록하다 처음에는 왼손으로, 그 다음엔 오른손으로, 그리고선 양손으로. 그리고 그렇게 두 손으로 연주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의 악절을 정정해가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마구 휘갈기며 지운 곳들도 있는가 하면 종이의 가장자리에 덧붙인 것도, 바꾸어 쓴 곳도 몇 군데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쟁이 끝난 뒤의 흔적과도 같아 그 엄청난 악보 중 한 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렸을 적 내가 좋아해 자주 치던 악보와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고서 손에 들었던 천편일률적으로 기록된 음표들이 나란히 인쇄되어 있는 악보 같은 것도 아니었다. 음표가 많든 적든 나에게는 악보가 세상의 전부였다.
-본문 페이지 237-238

 

그 소녀는 누구였을까? 저는 아직도 그 소녀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제 다리는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져간 그 소녀를 쫓아갈 수 없었습니다. 대체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중에 어머니께 여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 근처 어디에서도 제 또래의 금발머리 소녀가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꿈이나 환영, 아니면 유령이라도 본 것이겠죠.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쇼팽이 정열의 필적으로 악보를 써내려갔을 때 느꼈을 우수(憂愁)의 감정과도 같은 것이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이 악보들을 옮겨 적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음표들을 아무리 완전한 교양체로서 옮겨 적는다한들 말이죠. 저는 그날 본 그 환영을 도무지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여전히 그날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곡들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고 이것을 적은 손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무성하게 우거졌던 자연의 장소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 다시 그 길로 돌아가 보려 하면 그 잔디도, 식물들도 금세 다른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에스트로, 아무도 우리에게 이런 싸움에서 이겨낼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니, 어쩌면 제 말이 조금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날 오후 제 눈앞에 나타났던 그 금발머리 소녀가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까요? 아마 정열이 묻어나는 우수(憂愁)에 대해 제가 아무리 논한다 한들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겠죠. 인생에서 그저 갓길에 피어 있는 한 무더기의 풀숲과도 같을 것입니다. 제 인생에 정열의 풀숲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뭐가 될까요? 저에게도 사랑했던 여자들이 많았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다시 생각할 때마다 저는 그저 전부 잃을 뿐이었습니다. 쇼팽은 그의 솔랑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두 번 다시 그녀를 손에 넣을 수 없었을까요? 아마도 그랬겠죠. -본문 페이지 265-267

 

갑자기 나는 제임스가 말했던 그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제4번 발라드의 종결부가 얼마나 정열적이며 격노와 불가능과 그의 숙명까지 담고 있는 것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분명한 관능과 당황스러움까지도. 그 마주르카가 제임스의 모든 것이자 상실이었다. 또한 우수였으며 나중에 후회하기 위해 순간을 살지 않는 것에 대한 기쁨, 그 직후에 밀려드는 감각의 동시성의 작은 상실이었다. 나는 이제야 솔랑주를, 창문을 보고 앉아 있는 나의 솔랑주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른 나의 몸을, 이 노인의 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내 눈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머리를 벽에 기대고 있는 솔랑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녁이 데리고 온 바람결에 그녀의 황금빛 머리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알았다. 그것이 젊은 날의 한순간이라는 것을. 그 속에는 제임스도 있었고 나도 있었다. 그 속에는 우수도 존재했고 정열도 존재했다. 마치 서로 부딪히며 싸워대는 두 파도처럼 서로의 요소들을 잘 버무리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었다. 그 순간 내 인생이 바단조의 음악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환영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그 밤에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는 것과 그리고 우연에 맡겨진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가는 이야기들을 그런 식으로 하나로 엮어내는 일이야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인간들의 특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는 코드를 통해 세계를 풀어내고 하나의 언어를 끌어내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문자를, 그리고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문자를 해독해보이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안네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그녀의 관능을 떠올렸고 갑자기 내 몸쪽으로 다가온 솔랑주의 몸을 또 다시 느끼고 있었다. 
-본문 페이지 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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