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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와 김일성 냉전기의 북한 1945~1961

시모토마이 노부오 저 | 이종국 역 | 논형 | 201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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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3571263 / 314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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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북한의 주체사상과 김일성체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한반도 냉전에 대한 이해는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강조된 냉전에 대한 단순한 해석, 즉 이념과 군사적 대립이라는 이해를 넘어, 어떻게 한반도에서 북한정권이 형성되었으며, 그 이후 북한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어떠한 국내정치의 과정을 경험하였는가? 북한은 국내정치에서는 체제 강화와 주체화를 진행하고, 소련과 중국관계에서는 국내정치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에서 협력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북한은 58년 3월을 정점으로 자신이 ... 북한의 주체사상과 김일성체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한반도 냉전에 대한 이해는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강조된 냉전에 대한 단순한 해석, 즉 이념과 군사적 대립이라는 이해를 넘어, 어떻게 한반도에서 북한정권이 형성되었으며, 그 이후 북한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어떠한 국내정치의 과정을 경험하였는가? 북한은 국내정치에서는 체제 강화와 주체화를 진행하고, 소련과 중국관계에서는 국내정치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에서 협력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북한은 58년 3월을 정점으로 자신이 원하는 체제를 만들어 갔다. 이 책은 북한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구소련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외교사료를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구소련과 북한의 관계로부터 북한을 분석하며, 스탈린체제로부터 이식된 체제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연구동향과는 다르게 냉전사관과 수정주의사관을 넘어 새로운 외교문서를 기초로 소련의 강력한 지도와 북한의 저항이라는 동학 속에서 사회주의와는 ‘이질적인 체제’를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저자 소개

시모토마이 노부오(下斗米 伸夫)는 도쿄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 연구과 수료하고 현재 호세이대학 법학부 교수이다. 아시히신문사 논설위원, 일본국제정치학회 이사장 역임했고 러시아 정치, 비교정치를 전공했다. 주요 논저로는 [고르바초프의 시대], [러시아 현대정치], [아시아 냉전사] 등 다수가 있다.

역자 소개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석사,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게이오대학 방문학자를 거쳐, 현재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 『北朝鮮と人間の安全保障』, 『지방자치체 외교』 등이 있고, 역서로는 『모스크바와 김일성』, 『북한·중국관계 60년』, 『분단종식의 통일외교』, 『역사가가 보는 현대 세계』 등이 있다. 

책 속에서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참전이 결정되면서 일본의 패배가 예상되던 동북아시아 지도는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반도에 관한 문제는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의 주장에 따라 독립이 보장되었지만, 그 후 얄타회담에서 미소는 ‘상당기간’ 신탁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7월 포츠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미소 간 구체적 합의가 없었다. 그 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어서 9일 소련은 일본과 전투개시를 선언했다. 이렇게 하여 소련 적군(赤軍)이 대일참전을 했다.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하여 주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제25군이었다. 이 군대의 최초 역할은 관동군이 한반도를 통해 본국으로 탈출하는 것을 저지하는 일이었지, 한반도 북쪽을 점령·지배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 해결은 새로운 문제, 즉 분단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소련 측과 합의하고 양국의 점령에 관한 분계선을 38선으로 설정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대일참전 후,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급속하게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5년간 한반도의 점령통치, 1948년 북한 건국 그리고 50년 6월 25일 김일성에 의해 시작된 남침통일과 같은 과정에 매우 깊이 관여한 것은 소련 적군(46년부터 소련군)이었다. 그러나 1945년 말 작성한 소련 외교문서는 일찌감치 미소 점령정책의 차이로 불가피하게 대립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소련 측이 일본 침략자의 군사력 일소, 한반도에서의 일본 영향력 배제, 한반도의 민주적 통일을 목표로 했다면, 미국은 그것과 정반대로 구체제 유지, 일본점령 협력자의 유지를 목표로 했다. 45년 말경에는 이미 미소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명확해졌다.
이후 소련외무성은 12월 20일 몰로토프 외상 이름으로 극비리에 보낸 답장에서, 한반도문제에 대해 합동위원회문제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 소련 측이 미소 군을 48년 초까지 철군 제안한 반면에 미국 측은 유엔대표위원회의 감시 아래서 선거를 제안했다는 것, 이것에 대해 소련 측이 내정간섭이라고 반대했다는 것 등을 보고했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관계는 더욱 멀어져갔다. (1장 소련 참전으로부터 분단까지)

국제적인 측면에서는 분열국가로 향한 움직임이 점점 멈출 수 없게 진행되었다. 1948년에는 47년 유엔에서 한반도문제의 상정으로 그리고 유엔감시 아래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형태로 문제가 첨예화되었다. 특히 북한에 대한 유엔 감시단의 출입을 소련이 거부했다. 유엔은 2월 회의에서 5월 10일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내놓았다. 이어서 3월 31일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이 유엔 감시 아래 전국에서 선거 실시를 제안했다. 이것에 대해 소련 측도 유엔이란 장에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소련군의 동시철군과 한반도문제는 자국민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부되었다. 이렇게 하여 5월 10일 한국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7월 24일 친미파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내각도 8월 5일 발족했다. 이후 1948년 소련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는 유엔 주도 아래 한국에서 행한 선거결과를 거부하고, 대신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그 이후 전국선거를 지지하는 시나리오가 승인되었다. 란코프가 말하는 것처럼, 이 조직은 남한에서 유엔 주도의 선거결과는 분열선거라고 계속 부인하면서, 한편으로 북한 주도의 선거는 전국적 선거라고 보았으며, 그것과 동시에 북쪽에서의 독자적인 국가 창설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 후 북한의 독자적인 국가건설의 흐름이 결정되었다. 1949년 9월 2일 제1회 회의가 개최되고, 8일 헌법을 채택하고,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9월 10일 최고인민회의가 열리고, 김일성은 북한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전북한의 통일적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에 권한을 이양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 결과 탄생한 중앙정부는 남북한 인민의 총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강변했다[⑤/2/142]. 북측은 형식적으로는 남측을 해방되지 않는 영토로서 남측 인사를 자신들의 정부나 당에 포함시키려 했다. 북한헌법 아래서 통일이 가능하다고 한 이상, 북의 체제를 남한에까지 확대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1948년 9월 북한에서 국가제도형성이 완성되었다. (2장 점령권력으로부터 건국으로)

한국전쟁은 왜 발발(勃發)했는가? 1948년 상대방을 서로 인정하지 않은 채 통일을 과제로 한 남북의 두 정권이 출범했다. 양측의 헌법으로부터 볼 때, 상대 측의 ‘해방’은 합법적이었고 침략이 아니었다. 통일이라는 것은 각자의 지배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과 이것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상황에 따라 내전으로 전화하여 동맹관계를 통해 국제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되었다.
1948년 9월 성립한 북한을 둘러싸고 그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소련 그리고 점차적으로 중국 내전에서 승리를 하게 된 중국공산당의 영향이 커지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이 현실적 과제가 되었다. 소련지도부는 49년 1월 A. 미코얀 정치국원을 마오쩌뚱에게 보내 중국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를 대비했다[⑩-47]. 실제로 이러한 일련의 회담에서 무력통일에 대한 지시가 내려졌다. 러시아 자료에 정통한 A. 만스로프에 따르면,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5월 15일 조선통일에 관한 결정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은 군사적 전술을 그리고 박헌영은

여론과 정치동원을 분담했다. 17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 소련군 고문 바시리에프 장군과 방문 결과를 이야기했다. 또한 조선인민군의 향후 통일계획이 방어적이라면서 선제공격을 위한 계획을 입안하도록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姜健)과 소련 측 고문에게 요청했다. 소련 본국으로부터도 바시레프스키, 스테멘코 대장의 이름으로 공격계획 입안이 바시리에프에게 요청되었다. 소련인의 손으로 작성된 안은 세 개의 국면으로 되어 있는 1개월 간의 작전계획이었다. 첫째로 38선에서 남측의 북측에 대한 도발, 둘째로 공격에 대한 전면적 반격 그리고 셋째로 ‘3~4일 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전격작전안이었다. (3장 한국전쟁)

한국전쟁을 오래 끈 것은 스탈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마오쩌뚱의 정치적 의지였다. 그러나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전쟁이 종식으로 향하는 전기가 되었다. 그것은 김일성을 지지했던 것이 스탈린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사후 내무담당인 라브렌티 베리야를 시작으로 게오르기 말렌코프 수상, 이후 당 제1서기가 된 니키타 후르시초프 등 새로운 지도부가 세계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스탈린식 전쟁관에서 평화공존정책으로 전환했다.
외상에 복귀한 몰로토프가 술회한 것과 같이 한국전쟁은 “북한 사람들이 스스로 원한 것”이었고, 스탈린 이후 지도부가 한국전쟁에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⑪-161]. 또한 소련의 경제정책에서도 중공업으로부터 농업·소비재 중시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평화공존정책 가운데 54년 4월부터 6월까지 제네바에서 한국전쟁 정전을 평화협정으로 하는 교섭을 진행했다.
실제로 1948년 건국으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작된 한국전쟁은 북한의 경제와 사회에 많은 희생과 피해를 가져왔다. 55년 4월 김일성 수상에게 제시되었던 국민경제 개관에는 당시 감소한 북한 인구가 1,581,000명이었다고 전하고 있다[Ⓡ315/7]. 다음해 소련정부의 북한경제에 관한 보고서에서 나타난 북한의 인구는 8,528,000명이었다. 그러나 이 인구는 군인의 숫자를 가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 인구는 더 많았지만, 군인 숫자는 얼마였는지 알 수 없다. 인구감소의 이유로서 소련대사관의 레트로프 서기관이 중앙통계국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북한의 민간인 중 폭격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282,000명, 남쪽으로 끌려가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이 796,000명, 중국 등으로 도망한 사람이 80,000명, 경계선 확정 이후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이 40,000명, 군에 동원된 사람이 600,000명이었다. 그 가운데 군에 동원된 사람 중 사망한 수는 알 수 없다[Ⓢ1229/35]. (4장 전후 북한)

변동의 여파는 모스크바로부터 왔다. 1956년 2월 14일부터 24일 사이 개최된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라는 충격이다. 후르시초프 제1서기에 의한 스탈린 비판은 소련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의 사회주의 국가에 커다란 충격이었는데, 이것은 북한에게도 거대한 지각변동이었음을 소련대사관의 문서들이 밝혀주고 있다.
소련이 집단지도체제를 선포한 것은 1952년부터 수상직을 맡고 있었던 G. 말렌코프, 그와 처음부터 가까운 관계였던 L. 베리야, 공산당 서기였던 N. 후르시초프, A. 미코얀 등이었다. 스탈린 사후 수상으로 복직한 V. 몰로토프, L. 카가노비치 등 스탈린 시대부터 정치국원이었던 인물은 보수적인 형태로 지도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한편, 1953년 9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제1서기에 선출된 후르시초프는 점차 중요도를 더해갔다. 후르시초프는 1955년을 기점으로 점차 개인숭배 비판과 스탈린 비판 문제를 도마에 올리게 된다. 이러한 무대가 된 것이 56년 2월 14일부터 24일까지 열렸던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였다. 그 중에서도 세계전쟁 대신 자본주의와 평화공존이 가능하다는 테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평화시에도 가능하다는 테제와 함께 그때까지의 소련과 북한의 관계를 크게 바꾸어놓을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동시에 집단지도라는 당건설에서 새로운 교의는 ‘개인숭배’ 비판과 함께 스탈린, 김일성과 같은 독재적인 지도관을 근저에서 뒤흔드는 것이었다.
(5장 스탈린 비판과 북한)

1956년 2월 제20회 당대회를 계기로 중국파는 반김일성으로의 움직임을 강화했다. 김일성의 소련·동유럽 방문이 원활하지 않게 끝난 후 8월종파사건에서 장로격인 최용건, 특히 김두봉이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비판에 나섰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9월 23일 전후 중국과 소련 공산당에 의한 미코얀‧펑더화이 사절 파견이 순조롭지 않게 끝나자, 김일성에 의한 반격이 10월 동유럽 위기에 의한 사회주의체제 전반의 위기와 함께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위기는 가까스로 넘겼지만, 정치정세는 혼돈상태에 빠졌고, 가장 중요한 김일성 자신의 지도권문제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앞의 프자노프의 발언은 위기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김일성은 아직 내외적으로 확고한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굳건히 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1955년 중반의 당과 정부의 분리라는 모스크바에서의 공약을 새로운 체제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김일성체제에게도 하나의 커다란 시련이었다.
8월 반당종파사건 관계자에 대한 최종적인 처분이 발표되었다. 최창익, 김두봉, 박의완, 박창옥, 오기섭, 윤공흠, 김승화, 고봉기, 박훈일 이상 9명은 당중앙위원회에서 해임되었다[Ⓑ15/35/546]. 최고인민회의의 김두봉에게는 1961년 농민에 의한 투석처형이라는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이것은 김일성 독재를 지지하는 ‘주체’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기회가 되었다. 실제로 1958년 8월 북한에서는 집단화가 완성되었다고 선전되었다. (6장 ‘주체’체제의 확립)

목차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범례/ 문헌목록
1장 소련 참전으로부터 분단까지
1. 소련의 북한점령정책/ 2. 권력탄생/ 3. 모스크바 외상회의로부터 미소합동위원회로/ 4. 진행하는 38선 분단
2장? 점령권력으로부터 건국으로―북한의 형성과 소련
1. 통역정치/ 2. 선행된 국가기구 건설/ 3. 헌법 제정으로부터 국가건설로/ 4. 북한건국과 소련/ 5. 남침통일 야망
3장 한국전쟁
1. 개전 전후/ 2. 개전/ 3. 유엔군의 반공과 중국 참전/ 4. 1950년 12월(제3회)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5. 화평교섭이라는 전쟁/
6. 스탈린은 조기정전론자였는가?/ 7. 남노당의 수난/ 8. 스탈린 사후
4장 전후 북한―1953년 8월~56년 1월
1. 전후복구와 소련·북한관계/ 2. 숙청/ 3. 4월 테제/ 4. 깊어가는 농업위기/ 5. 1955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 ‘주체’의 정치학―문예평론과 탈 소련
5장 스탈린 비판과 북한
1. 제20회 소련공산당대회와 최용건의 보고/ 2. 제3회 조선노동당대회/ 3. 김일성의 소련·동유럽 방문/ 4. 8월종파사건/ 5. 이상조 대사의 김일성체제 비판 6. 소련공산당·중국공산당의 반응/ 7. 동유럽 혁명과 김 체제/ 8. 1956년 총괄
6장 ‘주체’ 체제의 확립
1. 김일성 지배체재/ 2. 반대파 숙청/ 3. 중소 대립과 북한/ 4. 후르시초프의 구애/ 5. 허울뿐인 동맹조약
맺음말/ 관련연표/ 역자 후기/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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