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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 국망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 보는 거울

시리즈 :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13]

박은식 저 | 김태웅 역 | 아카넷 | 201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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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7332320 / 332쪽 152 x 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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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한국‘통사(通史)’는 ‘통사(痛史)’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한국통사』 서언 지난 1910년 국망을 맞이하면서 좌절했던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의 동시대와 세계를 어떻게 보았을까? 오늘날의 시점에서 국망(國亡)의 시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 한국‘통사(通史)’는 ‘통사(痛史)’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한국통사』 서언 지난 1910년 국망을 맞이하면서 좌절했던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의 동시대와 세계를 어떻게 보았을까? 오늘날의 시점에서 국망(國亡)의 시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아카넷출판사)의 두 번째 책 『한국통사』 역해서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초점을 맞춰 원저자 박은식의 원문을 새롭게 번역하고 일반 독자들이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이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개인과 개인이 상호 동등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지난 역사에서 찾으려는 지금 『한국통사』는 이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만하다. 태백광노 박은식이 한국통사를 쓴 까닭은? 『한국통사』는 고종 즉위년(1863)부터 1911년 105인 사건까지 서술한 역사책으로 구성은 1책 3편 114장이고 한문으로 쓰였다. 이 책은 박은식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책으로 1914년에 완성되었으며 이듬해인 1915년에 상해 대동편역국에서 출간되었다. 『한국통사』에서 보이는 역사 서술 체제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체제인 기전체나 편년체를 따르지 않고 각 사건·사실들의 내용을 설명할뿐더러 그 원인과 결과를 서술함으로써 인과 관계에 입각한 근대적 역사서술 방법론을 적용한 것이 눈길을 끈다. 박은식은 국혼(國魂)을 잃지 않는다면 나라를 유지할 수 있으며 또 설령 나라를 잃을지라도 언젠가 국혼에 기대어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가로서 국혼이라 할 국사를 남겨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면 궁극적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이 책에서 한국 국망(國亡)의 시기, 근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결국 박은식이 아픈 역사, 쓰라린 역사란 뜻의 통사(痛史)를 기록한 뜻은 자신이 목격한 원통하고 분함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 언제나 당대를 비추어 ‘오래된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거울’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 ‘통(痛)’은 곧 분노이다!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정경을 보니 더욱 서글퍼져 어찌 견딜 수가 있겠는가. 고국을 바라보니 구름과 연기가 서린 듯 아득하기만 하구나.” “무릇 우리 형제는 서로 생각하고 늘 잊지 말며 형체와 정신을 전멸시키지 말 것을 구구히 바란다.” “무릇 세상의 강하고 사나운 자는 날로 약한 나라를 침략하여 삼키고 나약한 종족을 도태시키는 것을 능사로 삼으니……”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백두산이 있는 나라의 사람으로 망국을 슬퍼하여 미쳐서 돌아다니는 노예’란 뜻의 ‘태백광노(太白狂奴)’라는 필명으로 출간했다. ‘한국 근대사를 근대 역사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민족주체적 입장으로 정리한 근대 민족사학의 이정표적 저작이라고 평가받는 『한국통사』는 현실을 단 한 치도 외면하지 않은 나머지 미쳐버린 ‘광노’의 처지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박은식이 기록한 국망 이후의 역사, 작금의 우리 현실도 통사(痛史)로 기록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는 나라 잃은 부끄러움과 원통함으로 광노가 되어버린 역사가에게서 정당한 분노를 배운다. 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동기는 바로 ‘분노’라며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타인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고 발 딛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라며 설파하는 93세의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의 메시지와도 맥이 통한다. 백년 후에 되돌아보는 최초의 한국 근대사 일반 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로서의 기록 『한국통사』는 왕과 신하 위주로 서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 근대사를 민인 대중에 중심을 두고 사건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채택한 데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민족사학의 초석을 닦은 셈이다. 우리 국망의 시기 일제의 침략과 한국인의 근대국가 건설 운동을 인과관계에 입각하여 정면으로 서술했다는 점은 이후 한국인들이 일제의 폭압과 교묘한 동화정책에 굴하지 않고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박은식의 실천적 역사인식과 근대적 역사서술이 지니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주체의 형성과 발전은 자기 문화의 자주적 건설 경험과 외부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준다. 책의 구성 및 특징 -. 이 역해서는 『한국통사』의 주요 내용을 해설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본문 자체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해설은 되도록이면 박은식이 살았던 당대의 시점(時點)에 맞추었다. 그리고 당대의 정황을 풍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대표적인 야사라 할 수 있는 정교의 『대한계년사』, 황현의 『매천야록』 등과 대조하기도 하였다. 다만 저자가 사실을 잘못 알고 있거나 해석이 전혀 다른 경우에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참조하여 해설하였다. -. 『한국통사』의 전문을 번역하지 않고 역사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국내 정치적 주요 사건을 위주로 번역하였다. 이는 역해서의 분량을 고려한 가운데 해설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조약이라든가 경제 침탈 등을 보여주는 내용은 생략되었다. 번역한 원문은 각 장의 뒤에 실어 대조하게 하였고 아울러 전체 원문의 차례를 부록에 실어 번역에서 생략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원문의 편제를 따르지 않고 발췌 내용을 중심으로 3부로 갈랐다. -. 이전 번역본의 충실한 번역을 바탕으로 하되 드러나는 오류나 오역은 바로잡았다. -. 내용의 분량은 적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 부 처음에 해당 소시기의 역사를 개관하는 글을 붙였다. 이는 일부 원문 내용의 생략에 따른 공백을 메워주리라 본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 서울대규장각학국한연구원·대우재단 공동기획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는 우리의 고전을 학계의 분야별 전문가가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새롭게 번역하고 해설한 결과물이다. 고전에 대한 개설적인 해설서나 흥미 위주의 문화·생활사에 치우치지 않고 한국학 등 전문 연구자들이 고전 텍스트를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풀이하되 최대한 대중의 언어로 담아내어 학계와 일반 독자들의 지식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시리즈는 고전 텍스트에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집적하고 지식 교양의 대중적 확산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한국학 연구의 중심기관인 규장각과 기초학문 분야의 연구 진작을 위하여 각종 학술연구 활동을 지원해 온 대우재단의 공동 기획이다.

저자 소개

박은식(朴殷植, 1859. 9. 30∼1925. 11. 1)은 조선조 말기의 유학자이자 일제 강점기 언론인·교육자로서 제2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지냈던 독립운동가다. 호는 처음에 겸곡(謙谷)이었다가 나중 백암(白巖)으로 했다. 
조금 늦은 나이에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 성리학과 과거 준비를 하던 그는 일찍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17세 무렵 과거 공부에 회의를 느낀 그는 아버지의 서당을 떠나 당대에 이름난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을 비롯해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 그리고 구한말 영국 언론인이었던 베델[E. T. Bethell. 한국명 배설(裵設)] 등과 교분을 나누고,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을 찾아가서 학문을 배우며 당시 급변하는 사회 현실과 직접 만나게 된다. 
1898년 독립 협회에 가입하고 이어 개최한 만민 공동회에서 간부로 활동했고, 1898년 9월 창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로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사회참여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05년 11월 20일, 이 신문에 실린 장지연(張志淵)의 유명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문제 되어 사장이었던 장지연이 구속되고 신문은 정간되는 상황에서 박은식은 주필로서 폐간 때까지 사실상 ≪황성신문≫을 주관한다. 이 시기 그는 ≪대한매일신보≫에도 여러 차례 객원으로 논설을 발표한다. 
1906년 설립된 민중 계몽 단체인 대한 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대한자강회월보≫에도 역시 많은 계몽 논설을 썼으며, 10월에는 서우 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우≫(1906년 12월 창간)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저술 활동에도 힘쓰며 여러 권의 책과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1907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원로회원으로 참가하는데,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해서 1909년 창립된 서북 학회(西北學會)를 실질적으로 지도하면서 기관지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발표한 <유교구신론(儒敎救新論)>은 실천적 모습으로의 유교 개혁을 주장하면서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박은식은 서북 학회의 산하 교육 기관으로 서북협성학교를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교장을 맡기도 한다. 
1912년 상해로 이동해 여러 우국지사들을 만나면서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했다. 동제사는 겉으로는 상해에 있던 한인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었지만, 독립을 목표로 해외 여러 곳에 지사를 두는 등 많을 때는 30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박은식은 총재를 맡아 여러 활동을 하면서 1913년 상해에 교육 기관인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는 등 두드러지는 활동을 한다. 
1914년에는 상해에서 교류하던 중국인들의 권유로 홍콩으로 건너가 중국 혁명당 관계자들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발행한 잡지 ≪향강(香江)≫의 주필을 맡다가, 이 잡지가 당국에 의해 정간 조치되면서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상해로 돌아온 뒤에는 ≪안중근전≫과, 망명 중 틈틈이 집필해 오던 국권 상실의 과정이 기록된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서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3편 114장)를 중국의 출판사에서 발행한다. 
1915년, 이상설(李相卨),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신한 혁명당을 결성한다. 1918년 러시아 우스리스크 지역의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초청으로 현지로 이동해 기관지 ≪청구신보(靑丘新報)≫(이후 ≪한족공보≫로 변경) 주필을 맡는다. 1919년 1월, 해외 망명 지사들이 추진한 ‘대한 독립 선언서’에 39인 중 한 명으로 서명을 했으며, 3·1 운동의 영향으로 17일 이 지역의 독립운동 대표 기관인 국민의회가 주관한 독립 선언식에서 선언서를 작성한다. 26일에는 미국의 서재필과 홍범도 장군을 포함한 대한 노인 동맹단을 조직하면서 발족 취지서를 작성했다. 
1919년 8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다시 상해로 온 박은식은 갓 출범한 임시 정부에서 사료 편찬 위원회의 책임을 맡았다. 이듬해 독립 투쟁사를 기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다. 1921년에는 초대 사장이었던 이광수와 편집국장 주요한이 변절하면서 떠나간 임시 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로 선임된다. 이후 임시 정부 조직 개편을 위한 국민 대표회의의 결렬로 인해 임시 정부가 약화되면서 기관지 발행도 어렵게 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24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독립신문≫ 간행을 책임지게 된다. 12월에는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미국으로 떠나 버린 이승만 대통령의 대리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1925년 3월 21일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면서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으로 선임되었다. 임시 정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수락한 박은식은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하는 내각 책임제 개헌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추천, 선출한 뒤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사임 이후 병세가 악화되면서 11월 1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에게 유촉(遺囑)을 남긴 뒤 상해의 병원에서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임시 정부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상해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에는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목차

목차
서언
제1부
1. 지리의 큰 줄기 2. 대원군의 섭정 3. 경복궁의 중건 4. 서원 철폐
5. 조세제도 개혁 6. 프랑스군을 크게 이김 7. 미국 함대를 물리침
제2부
1. 임오군란 2. 갑신정변 3. 갑오동학란 4. 갑오개혁 5. 일본인이 국모를 시해함
제3부
1. 국호를 대한으로 고치고 제국이 됨 2. 이토가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함
3. 줄 잇는 애국 선열들의 순국 4. 중국지사 반종례가 바다에 투신자살함
5.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 6. 군대해산과 참령 박승환의 순국
7.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 살해함 8.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함
결론 / 『韓國痛史』 原文 차례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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