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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2763457 / 320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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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펼쳐진 무예비급, 조선시대 최초의 공식 무예서武藝書
『무예제보武藝諸譜』
“흔히들 조선시대가 문文에 치우친, 문약文弱에 빠진 시대라고 자조하거나 심지어 우리에게는 무예가 없었다고까지 말한다. 조선이 개국되면서 무인武人의 ‘칼’은 문인文人의 ‘붓’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문화국가를 자처하던 조선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힘은 폭력일 수밖에 없음은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조국을 지키기 위한 무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쓰여질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무인들의 고민과 노력을 그들이 남긴 ‘무예서武藝書’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무예의 구체적인 기술과 훈련법이 적혀 있는 무예서에는 실제로 무기를 잡고 적과 싸워야 했던 무인들의 ‘싸움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 본문 중
‘십팔기十八技’, 조선왕실을 굳건히 지켜낸 우리의 무예
조선 중기까지 무예서들은 군대, 또는 무장집단(문파, 지방군벌 등)의 기밀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는 공식적인 무예서 편찬을 통해 통일된 무예를 전군과 민간에 보급하려 노력하였다. 이는 ‘조총’이라는 개인화기의 발달과 전투규모의 비약적 증대 등의 급변하는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내려는 무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다시 말해 무예가 개인 또는 사회집단의 영역에서 국가적인 영역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을 역사적인 상황과 구체적인 무예서의 내용을 통해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 책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창설된 훈련도감에서 편찬한, 역사상 최초의 공식 무예서인 『무예제보』를 설명하는 데 많은 공을 기울이고 있다. 까닭인즉, 『무예제보』는 당시 조선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울 때 반드시 필요했던 무예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겨 있어 이를 통해 당시 군사들의 무예 훈련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투를 벌이는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재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내며 정립하게 된 조선만의 독자적인 무예체계이자 국가를 방어하는 무예인 ‘십팔기十八技’와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의 탄생 배경과 역사적 의의, 그리고 그 우수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왕실을 지켜내고, 우리의 역사를 수호해낸 조선의 국기, 십팔기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1장. 임진왜란, 왜적의 손아귀에서 조선을 지켜내다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대륙 정벌을 감행했다. 싸움에 굶주린 일본군은 현해탄을 넘어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 정규군의 대규모 침공은 곧바로 조선을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변화된 모습과 강력한 전투력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조선은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명군이 개입함에 따라 전쟁이 길어지자, 전통적인 장기였던 우수한 화학무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기 위해 훈련도감이라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직업군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역사상 최초의 공식 무예서인 『무예제보』가 편찬되었다.
2장. 여진족의 말발굽에 짓밟힌 조선 그리고 북벌北伐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직접 전쟁을 치렀던 광해군은 급부상하던 여진족이 세운 후금과 전통적으로 조선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명 사이에서 절묘한 실리외교를 추구했다. 하지만 명에 대한 의리론을 앞세우던 서인 정권에 의해 광해군의 집권은 얼마 안 가 막을 내렸으며, 이는 후에 오랑캐라 무시해왔던 여진족에게 조선의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는 치욕을 겪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조선에게 야만스럽고 힘만을 앞세우는 청과 군신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왕자 시절 청에 볼모로 끌려갔던 경험이 있는 효종은 이 치욕을 씻기 위해 은밀히 북벌을 준비했다. 효종은 조선의 군사력과 전투기술로 북벌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현실적으로 잇따른 전란으로 인해 물자와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전쟁자금을 모으고 군사들에게 꾸준히 무예훈련을 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3장. 최강의 조선군 건설 : 사도세자와 정조의 십팔기十八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한반도는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무인들은 중국의 한족과 북방의 기마민족, 그리고 일본군이 한데 어울려 서로 치열한 실전을 겪은 흔치 않은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6세기 이후 조선은 독자적인 무예체계인 ‘십팔기’를 정립하기에 이른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했다고 평가받는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뜻을 이어받아 조선의 무를 재건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여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개혁을 이룩하고자 했다.
4장. 조선의 하늘에 비끼는 노을 그리고 새로운 아침
1800년, 조선의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던 정조는 재위 24년 만에 갑자기 서거했다. 정조의 나이 49세였다.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렸다. 그의 죽음과 함께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추진되던 모든 개혁정책은 기득권층에 의해 슬그머니 폐기되었고,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도 해체되었다. 그리고 세도가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극단적인 귀족 정치인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조선은 다시 독립을 찾고,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지만, 일본제국주의시대에 사라진 민족문화와 정신의 원류를 다시 찾기는 쉽지 않았다. 서구와 중국, 일본은 각자의 무예와 스포츠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을 때, 왜곡되어지고, 파괴된 민족문화와 우리의 무예는 몇몇 선구자의 노력에 의해서 조금씩 불씨를 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전투를 대비해서 사람의 몸을 공격과 방어에 맞게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무예의 목적이다. 그런데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사실 꽤나 복잡한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 제대로 된 무예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체의 움직임과 무기의 형태, 그리고 이 둘을 연결시키는 개념과 이론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무가武家에서는 다양한 무예 이론들을 발전시켜왔다. 기氣, 경勁, 수법手法, 보법步法, 심법心法 등이 그것이다. 고도로 복잡한 개념을 사용하는 현대의 로봇 공학으로도 사람처럼 두 발로 시원스럽게 달리는 로봇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런데 당시 조선의 군대에서는 이러한 무예이론의 전수가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이는 조선 건국 이후 상대적으로 긴 평화의 시기를 겪으면서 무관을 배출하는 무인층이 심각하게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의 주력군이던 갑사甲士는 소멸되었고, 기마병이 서울로 근무하러 올라와 장비 점검을 받을 때는 돈을 주고 잠시 말을 빌려서 통과했을 정도였다. 물론 민간에서는 비록 소수였지만 여러 경로로 무예가 전수되고 있었다.
- 52p~53p
한교는 『기효신서』에 수록된 무예 중 맨손으로 하는 권법을 제외하고 가장 시급히 도입해야 할 여섯 가지 무예를 완전히 이해하고 1598년 『무예제보』를 편찬했다. 이 책은 훈련도감이 창설된 이후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각 무예의 보를 하나의 책으로 묶어 전 조선군에 보급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여러諸 무예의 보譜를 한데 묶었다는 뜻의 『무예제보』는 『기효신서』에 수록된 무예를 참고하여 만들었지만, 『기효신서』와는 큰 차이점이 있다. 우선 책의 성격에서 차이가 있다. 『기효신서』는 병법서이며, 그 내용 중의 일부로 무예를 정리하고 있는 반면에 『무예제보』는 국가기관인 훈련도감에서 편찬한 것으로 조선군의 공식 무예 훈련 규정이었다. 이렇게 국가기관에서 무예서를 공식적으로 편찬한 것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57p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당시 조선의 군영에서는 『무예제보』의 6가지 무예 외에도 여러 가지의 무예가 추가로 도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각 흩어져 있던 군영에서 제각기 전수되다 보니 통일된 형태를 갖출 수 없었다. 이는 중앙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중앙군에서 파견된 교사敎師를 통해 무예훈련을 받는 지방군의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자신의 측근무사인 임수웅에게 지시하여 『무예제보』 이후 추가 도입된 무예의 표준을 확립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도 몸소 각 무예를 시험했다. 그 무예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죽장창竹杖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본국검本國劍, 제독검提督劍, 쌍검雙劍, 월도月刀, 협도挾刀, 권법拳法, 편곤鞭棍의 12가지였다.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관무재의 기록에 보면 이미 숙종 대에 이들 12가지 무예가 추가로 도입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기존의 6가지 무예와 더불어 도합 18가지의 무예에 대한 표준작업이 진행되었다.
-169p
정조 14년, 1790년 어느 봄날, 심혈을 기울여 완성된 무예서가 정조에게 올려졌다. 이 책은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마지막 권은 앞의 내용 중에서 실제적인 무예동작의 내용을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풀이한 것이었다. 이를 받아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못다 이룬 조선 무예의 통일을 이루고, 세상의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무예신보를 되살려낸 것이었다. 정조는 마침내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받아 훨씬 뛰어난 결과물을 얻어냈다. 정조는 자랑스러운 이 무예서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7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