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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49908236 / 505쪽 210 x 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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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1. 가계와 학문적 배경 김대락은 1845년(헌종 11)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1825 ~1895)과 어머니 함양박씨(1824~1877, 예천 맛질, 부친 박득영朴得寧)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락의 자는 중언中彦, 호는 분서賁西라 하였는데, 후일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언저리에 산다는 뜻에서 백하白下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였다. 아버지 김진린은 의성김씨 30세로 내앞마을 입향조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둘째아들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후손이다. 김진린은 1825년 김헌수金憲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김... 1. 가계와 학문적 배경 김대락은 1845년(헌종 11)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1825 ~1895)과 어머니 함양박씨(1824~1877, 예천 맛질, 부친 박득영朴得寧)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락의 자는 중언中彦, 호는 분서賁西라 하였는데, 후일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언저리에 산다는 뜻에서 백하白下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였다. 아버지 김진린은 의성김씨 30세로 내앞마을 입향조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둘째아들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후손이다. 김진린은 1825년 김헌수金憲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김억수金億壽에게 출계하였다. 그는 1886년 3월 17일 금부도사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이 집을 ‘도사댁’이라고 부른다. 도사댁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으로 세칭世稱 ‘삼천석댁’으로 불릴 정도로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다. 당대의 가세를 입증할 만한 호구단자 4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김진린이 43세(김대락 23세)되던 해의 호구단자를 살펴보면, 솔거와 외거노비 3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노비들은 일직ㆍ선산ㆍ풍기ㆍ순흥에 거주하였다. 이로 보아 이 지역에도 적지 않은 토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남 3녀 가운데 장자였던 김대락은 김효락金孝洛(1849~1904)ㆍ김소락金紹洛(1851~1929)ㆍ김우락金于洛(1854~1933)ㆍ김정락金呈洛(1857~1881)ㆍ김순락金順洛(1860~1937)ㆍ김락金洛(1862~1929) 등 남동생과 여동생 각각 셋을 두었다. 김효락은 만식ㆍ제식 두 형제를, 소락은 조식ㆍ홍식ㆍ정식 3형제를 두었다. 이 조카들이 김대락의 망명을 도왔고 망명 뒤에도 그를 따라 서간도에서 활동하였다. 또 화식ㆍ문식ㆍ영식 등의 종질(당질)들도 많았는데 이들도 만주로 망명하여 김대락을 도왔다. 김대락은 일생동안 두 사람의 부인을 맞아, 그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첫 부인은 여강이씨 회재 이언적의 후손으로 부친은 이선구李選久이다. 김대락의 정확한 결혼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9세 되던 1864년 맏아들 김명식金明植이 태어난 것을 보면 10대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첫 부인은 맏아들이 태어나던 1864년 10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김대락은 안동권씨 권병수權秉銖의 후손을 새로운 부인으로 맞았다. 그 사이에서 김형식金衡植과 딸 하나가 태어났다. 김형식이 태어난 것은 1877년이다. 장자가 태어나고 무려 13년 만에 얻은 아들이다. 장자 김명식은 1902년 작고하였고, 딸은 여강이씨 이석정李錫禎에게 출가하였다. 뒷날 김형식은 김대락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손자 창로와 정로, 종손자 문로와 성로成魯 등도 김대락을 따라 망명하였다. 백하 김대락의 수학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의 문인이었다는 기록 이외에 그의 행적을 알려주는 연보나 행장이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추정하건대 유년시절 김대락은 조부 김헌수(1803~1869, 자 聖章, 호 百忍齋)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헌수는 20세 되던 1822년부터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안동의 거유들과 교류하던 내앞마을의 대학자였다. 류치명의 문인록 ■■평문제현록坪門諸賢錄■■에 등재된 내앞마을의 인사는 모두 7명이다. 이 가운데 김헌수는 최고령자이자 이른 나이에 정재 문하에 출입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성장기 수학과정에 영향을 준 인물은 숙부 김진기金鎭麒(1830~1917, 자 岡瑞, 호 愚下齋)로 추정된다. 김진기는 도사공 김진린의 실제實弟로 개항기 위정척사운동을 펼쳤던 안동의 대표적인 유림이다. 1876년 일본과의 개항에 직면한 안동 유림들은 척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3월 1일 척화상소斥和上疏를 위한 대유회大儒會를 안동에서 열었고, 이어 산양山陽(현재 문경 산양)에서 도회道會를 열기로 하였다. 이때 김대락의 숙부 김진기는 이만도李晩燾ㆍ류지호柳止鎬ㆍ류기호柳基鎬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시국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1876년에 진행되던 척화논의는 집단적인 척사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을 펼쳤던 김진기는 1895년 의병창의 때에는 형兄 김진린의 상을 당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이를 규탄하는 상소에 앞장섰다. 박주대의 ■■저상일월渚上日月■■에 따르면 1906년 1월 대구부에서 예천으로 훈령이 내려와 창의 즉 상소한 이유를 캐물었는데, 안동출신으로는 하회의 류비승柳秘承(秘書監承)ㆍ귀미의 김욱래金郁來ㆍ천전의 김강서金綱瑞가 명단에 들어 있었다. 세 사람은 을사늑약 후 맨 먼저 통문을 내어 각 읍 유생들에게 궐기를 권유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조사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김강서가 바로 김진기이다. 류비승은 하회마을의 류도성(1823~1906)이다. 김대락의 학문 활동에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은 바로 김흥락이다. 김흥락은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안동의 대표적인 유림이다. 결론적으로 김대락의 수학과정과 학문 활동에 영향을 준 인물은 류치명의 문하에서 활동하였고, 국권회복운동기에는 의병항쟁과 척사운동을 펼쳤던 인물들이었다. 2. 신학문의 수용과 협동학교의 확장 위정척사운동에 이어 의병항쟁을 주도했던 안동의 유림들 가운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혁신유림革新儒林이 등장하였다. 류인식柳寅植ㆍ김동삼金東三ㆍ이상룡李相龍이 그들이다. 이들은 위정척사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 구국계몽운동을 지향하였다. 그 출발점에 선 사람이 류인식이다. 류인식은 1904년 무렵부터 당시 국내외정세를 약육강식弱肉强食ㆍ우승열패優勝劣敗의 형국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서구를 발달된 기술과 풍부한 재원, 강력한 병력, 명료한 법률 등을 가진 나라로 판단하였다. 이에 비해 우리는 밖으로 외침의 우려가 있고, 학술이 비루하고, 사기士氣가 부패하였으며, 재원이 고갈되고, 정치가 문란하여 망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류인식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신학新學을 통한 인재양성을 제시하였다. 신학이 인륜人倫을 어지럽히고 인심을 무너뜨리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이 아니며, 신학에서 다루는 지지地志ㆍ역사ㆍ법률ㆍ산술ㆍ농상학ㆍ기화학은 선비들이 당연히 강론해야 할 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척사유림이 가장 문제라고 주장하는 체조와 어학 가운데, 어학은 날로 번성하는 국제관계에 대비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요목임을 강조하였다. 체조 또한 구학舊學에서 다루던 무예와 다름없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류인식은 신학으로 길러진 선비야말로 나라의 진정한 원기元氣가 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신학이야말로 선비가 국제사정에 통달하여 나라를 경영하고 어려움을 구제할 진정한 학문이라고 보았다. 또 신학을 통해 배양된 선비야말로 바른 정치를 펼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류인식은 이러한 신학의 유용함이야말로 편협한 구학舊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적의 학문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터하여 류인식은 1907년 안동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류인식이 협동학교를 열었다면 협동학교의 확장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김대락이다. 그가 신학문을 인정하고 수용하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다. 김대락은 협동학교 설립 당시 신교육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학문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60여 년 그의 생애는 주자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안동의 다른 유림들과 다르지 않았다. 비록 1895년 12월 안동의 각 문중이 을미의병으로 봉기할 때, 그해 3월 아버지 김진린이 작고하여 여막을 지키느
발간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지난 2007년 8월에 문을 연 뒤로 안동 사람들의 독립운동을 찾고 알리는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전시와 교육, 학술회의, 대중강연회, 교양총서와 연구서 발간 등 방법은 다양했고, 그 가운데에는 독립운동을 담고 있는 자료를 발굴하여 발간하는 작업도 있습니다. 이는 안동 사람들이 남긴 자료를 연구자만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제공하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이끌어 내면서 관심을 높이는 데 목적을 둔 사업입니다. ■■국역 석주유고石洲遺稿■■와 ■■권오설 자료집■■이 그렇게 편찬되었습니다.
2011년은 만주망명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우리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가던 과정을 기록한 ■■백하일기白下日記■■를 번역하여 간행합니다. 김대락은 1911년 망명하면서 기록한 「서정록西征錄」을 시작으로, 이듬해의 「임자록壬子錄」, 그리고 그 다음해의 「계축록癸丑錄」 등 모두 3년 동안 이동과 정착, 망명인들의 삶을 담았습니다. 이 기록은 서간도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기지건설의 초기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이 시기의 상황을 이 만큼 자세하게 남긴 일기는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에게나 만주 사회를 이해하려는 분들에게는 경전 같은 자료입니다. 연구자와 작가, 문화유산해설사, 독립운동유적해설사, 문화콘텐츠 사업을 펼치는 사람,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도 좋은 정보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이 자료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복원해내는 데 도움이 되고, 또 그런 결실이 곳곳에서 맺어지길 기원합니다.
이 자료집은 많은 분들의 공력이 들어간 작품입니다. 번역을 맡아준 사단법인 교남문화 김명균 대표와 김윤규 연구소장을 비롯한 여러 연구원들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각주에 밝히고, 교정과 교열에 매달려 준 우리 기념관의 학예연구실장을 비롯한 학예연구원들의 노고도 적지 않았습니다. 끝으로 경인문화사 한정희 사장님과 편집부 담당자의 도움과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2011년 11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김희곤
목차
발간사
일러두기
화보
김대락 가계도
해제
서정록
임자록
계축록
찾아보기
국역 백하일기 참여자 약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