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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자서전 함석헌 저작집 29

시리즈 : 함석헌 저작집 [31]

마하트마 간디 저 | 함석헌 역 | 한길사 | 2009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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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5660797 / 588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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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웅혼한 역사의 외침,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을 읽는다
서거 20주기 및 탄생 108주년에 새로운 편집으로 간행된 ‘함석헌저작집’ 전30권 !


불안과 위기의 이 시대에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양심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이념에 사로잡히고,
무지와 물욕에 빠져 있는 우리의 잠든 혼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동서고금의 사상을 넘나들며 사람의 도리와 생명의 본질을 설파하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과 글은 오늘 우리들에게 삶의 비전이자 정신적 지표입니다. 선생의 저작은 상아탑 연구실이나 책상머리에서 쓴 것이 아니고 험난한 20세기 역사의 현장에서 몸소 체험하며 가슴에서 토해낸 ‘민족자서전’입니다. 정치와 언론, 교육과 종교의 혁명을 강조하며 다양한 삶(생명)의 원리와 실천론이 아우러집니다. 함석헌은 역사와 사회가 십자가를 이루는 교차점에 늘 서서 사유하고 실천한 공인으로, 지공무사의 정신으로 평생을 살아간 선비입니다. 민중들과 더불어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 그들의 무지를 사랑으로 깨우친 씨알들의 스승이었습니다. 불안과 위기의 이 시대에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양심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이념에 사로잡히고, 무지와 물욕에 빠져 있는 우리의 잠든 혼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서거 20주기 및 탄생 108주년에 즈음하여 펴내는 ‘함석헌저작집’(전30권)은 1988년 전20권으로 간행된 ‘함석헌전집’을 토대로 그 이후 새로 찾아낸 72편의 시와 수십 편의 강연, 편지, 에세이를 수록하여, 오늘의 독자 감각에 맞게 새로운 디자인으로 편집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말씀과 글에는 마치 악곡의 변주곡처럼 거듭 반복되는 몇 가지 일관된 주제가 있습니다. 민중과 씨알, 민중사관 및 고난사관, 비폭력 평화주의, 국가(지상)주의 및 민족(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세계주의(globalism)로의 이행. 개혁과 혁명, 사회진화론, 종교적 가치관, 새 종교와 새 인류의 대망(待望). 개인주의를 넘어선 전체주의(holism), 상생론적 같이살기운동의 전개 등이 그것인데, 모두 혁명적인 거대 담론들입니다. 개인사와 민족사를 넘어선 인류 전체의 보편사 차원의 문제와 씨름하는 독창적 독자적인 담론들입니다. 이 주제들을 유의하면서 함석헌 선생의 말씀과 글을 읽는다면 우리는 큰 깨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29.간디 자서전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한다.”
함석헌저작집 제29권 『간디 자서전』은 마하트마 간디의 『An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를 함석헌 선생이 번역한 것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된 『간디 자서전』을 근간으로 했다.

저자 소개

  • 저자 : 마하트마 간디
지은이 : 함석헌
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역자 소개

  • 역자 : 함석헌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1928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해방 무렵까지 농사를 지었다.

1940년에는 계우회 사건으로, 1942년에는 「성서조선」 사건으로 각각 1년씩 일제에 투옥되었으며, 해방 후 1945년에도 신의주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58년에는 「사상계」에 투고한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서대문형무소에 20일간 구금되었다.

1970년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엄혹한 시절에 시대의 정신을 일깨웠다. '한국의 간디',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등의 수식어와 함께 퀘이커교도, 기독교 사상가, 인권 운동가, 언론인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던 그는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책 속에서

이따금 나는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는 하지만, 타고난 이 수줍음이 내게 손해를 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내게는 아주 유익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기를 꺼리는 것이 한때는 고민거리였지만, 지금은 나의 즐거움이다. 가장 큰 유익함은 그것이 내게 말을 경계하기를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자연히 나는 생각을 제어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의 생각 없는 말이 새어나오는 일은 혀로나 붓으로나 별로 없다는 증명서를 기꺼이 써줄 수 있다. 나는 내 말이나 글에 별로 후회했던 기억이 없다. 그렇게 해서 많은 화를 면하고 시간의 낭비를 피할 수 있었다. 경험은 나에게 진리의 숭배자에게는 침묵이 정신적 훈련의 한부분이란 것을 가르쳐주었다.
-p.92~93 성장의 시간

목차

간디의 길은 우리의 길 |옮긴이의 말
내 속에서 발견한 절대진리|머리말

1 성장의 시간
태어남과 그 집안
어린 시절
조혼
남편 노릇
중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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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둠의 땅, 남아프리카
레이찬바이
어떻게 생활을 시작했던가
첫 소송사건
생애 첫 충격
남아프리카로 갈 준비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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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의 일은 인도에 있다
폭풍전야
폭풍우
폭도들
폭풍 뒤의 평온
자녀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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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티아그라하, 끝없는 진리의 실험
사랑의 헛수고
아시아에서 온 귀족
모욕을 참고
다시 살아난 희생정신
반성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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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원과 투쟁, 다시 민중 속으로
예비적 경험
푸나에서 고칼레와 함께
협박이었던가
산티티케탄
3등 승객의 비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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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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