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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 살어리랏다

김상훈 저 | 보리 | 2008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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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84285477 / 501쪽 143 x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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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이 책에는 ‘공무도하가’를 시작으로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불린 참요까지 고대 가요 70여 편과 양반을 풍자하거나 골려주는 아이들 노래,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 부른 군인들의 노래와 의병들의 노래, 개화 운동과 함께 부른 노래, 인정세태를 보여 주는 노래로 지금도 널리 불리는 ‘아리랑’, 문헌설화에서 볼 수 없는 천지창조 신화를 담은 ‘창세가’, 제주도 무가 ‘이공본풀이’며 에밀레종 전설을 노래한 ‘봉덕가’까지 307편을 담았다.

배경 설화와 함께 보는 우리 노래의 원천, 고대 가요

고조선 때 ‘공무도하가’에서 삼국시대 향가, 고려시대 고려가요, 경기체가와 이제현이 채록한 고려시대 민요들, 그리고 문헌에 전하는 참요들을 실었다.
고대 가요는 우리 겨레가 수천년 동안 불러 온 우리 노래의 원형이다.
고조선 때 남편을 잃은 여인이 “님아 물 건너지 마오” 외친 소리가 노래가 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고려 가요 ‘가시리’로, 한말 ‘아리랑’으로, 그리고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이어져 왔다. 노랫말은 달라졌지만 노래에 담긴 정서는 변함이 없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제 삶에 견주어 다시 불렀을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힘이 되어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불리고 있는 것이다.
향가는, 북에서 홍기문의 향가 해석을 바탕으로 다시 현대문으로 고쳐 쓴 것이며, 고려가요는 김태준이 《고려가요집성》(1936)에서 해석한 것을 북에서 다시 현대문으로 고쳐 쓴 것이다.

양반 지주들을 골려 먹는 노래

전통 농경사회에서 아무리 일을 해도 끼닛거리가 없는 백성들의 한탄과 분노를 담은 노래, 부모들과 삶의 애환을 함께하면서 세상을 바라본 아이들의 노래를 만난다. 특히 아이들의 노래에는 아이들 눈에 비친 사회의 불합리한 모습이 아이들의 말로 표현되어 있다.
‘노닥노닥 기운 바지’가 너무 해져서 ‘새털 같은 바지’를 입고, 장에 가도 ‘지주집 장짐만 한 짐 지고’ 오는 아버지며, ‘울 아기는 사흘 굶고 울어도’ ‘부잣집 아기께 젖을 먹이고’ 끼닛거리가 없어 ‘비칠비칠 나물 캐러 가는’ 엄마. 아이들 눈에, 빚 독촉을 하는 ‘배뚱뚱이’ 지주는 ‘독사’ 같고 ‘살모사’ 같다. ‘개 팔아 두냥반’이고 ‘개똥밭에 미나으리’ 같은 ‘놀고먹는 지주 첨지’는 ‘도둑놈 중에도 상도둑놈’이다. 쿡 찌르면서도 은근슬쩍 비켜서며 양반 지주를 골려 먹는 아이들 노래를 만나볼 수 있다.

저자 소개

  • 저자 : 김상훈
편자 : 김상훈
1919년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서 빈농이었던 김채완(金采琓)과 부인 안동 권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출생 직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채환(金采煥)과 부인 의성 김씨 슬하로 입양되었다. 거창의 지주였던 큰아버지 역시 종가를 지키기 위해 입양된 사람으로서 별다른 차별 대우를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양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이후 시인은 경제적 차이가 나는 두 집안을 보면서 내면적 괴로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학문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의 엄격함 때문에 독선생을 모시고 어릴 때부터 한학을 익혔던 김상훈은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문재가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신학문을 배우고 싶었던 김상훈은 아버지를 설득해 방과 후에도 한학을 계속 익힌다는 조건으로 뒤늦게 가조보통학교에 입학, 15세인 1933년에 졸업(4회)했다.

18세인 1936년에는 단식을 하면서까지 아버지와 대립한 끝에 서울의 중동중학교(5년제)에 입학해 영어 선생님이던 김광섭의 지도를 받고, 급우인 유진오와 함께 도서반원 활동을 하며 문학을 접하게 된다. 이처럼 아버지와 의견을 달리하던 김상훈은 이후 점차 아버지의 친일 지주적인 면과 강하게 대립하게 되는 한편, 반대로 어머니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21세가 되던 1939년 11월 27일 ≪조선일보≫에 처녀작 <석별>을, 12월에는 ≪학우구락부≫에 <초추(初秋)>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1941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만월’이라는 문학 서클(정준섭, 조세환, 서갑록 등 7명으로 구성)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임화 등과 교류했다. 학교를 조기 졸업한 뒤 1944년에 징용으로 원산의 철도 공장에 끌려가 선반공으로 일하게 된다. 징용 중에 걸린 맹장염으로 긴급 수술을 하게 된 김상훈은 친구인 시인 상민(常民)의 권유로 요양을 핑계 삼아 징용을 탈출해서 항일 무장 단체인 협동당 별동대에 가담해 발군산에 입산한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 피검되어 구속 수감 중에 해방을 맞게 된다.

출옥 이후 김상훈은 조선학병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등에 가입하면서 해방 공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 11월 30일 ≪민중조선≫을 창간하고 발행인 겸 주간으로 일하면서 작품을 발표하고 ‘월요회’를 구성, 1946년에는 김광현, 박산운, 유진오, 이병철 등과 공동 시집 ≪전위 시인집≫(노농사)을 간행한다. 한 사람이 5편씩, 총 25편의 시를 수록한 이 시집에는 임화와 김기림이 서문을, 오장환이 발문을 썼는데 이를 통해 김상훈은 해방 공간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진 시인 중 한 명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른바 ‘전위 시인’으로 불리던 김상훈은 1947년 김광균의 글 <문학 평론의 빈곤>(≪서울신문≫, 3. 4)에 반박해 <빈곤의 논리>(≪독립신보≫, 3. 11)를 발표하고 이어 <시경에서 보는 계급 의식>(≪문학평론≫, 4. 19), <테러 문학론>(≪문학≫ 4호) 등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의식을 보다 구체화한다. 5월에는 26편의 항쟁시를 포함한 시집 ≪대열≫(백우서림)을 발간하고, 강원도 지역을 순회하는 ‘문화 공작대’로도 활약한다. 이듬해 10월 서사시집 ≪가족≫(백우사)을 발간하고 번역 시집을 내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하다가, 끝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고초를 겪기도 한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에 좌익 세력 색출 과 통제, 회유를 위해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서 전향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북한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입대하게 되고, 종군 작가 신분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10월경 유엔군에 쫓겨 입북한 뒤 그대로 북한에 남는다.

북한에서는 ‘문예총’에 가입해 임화의 도움 아래 ≪문학전선≫ 편집인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남로당 계열 문인 숙청 때 김상훈 역시 추방되어 한때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후 1962년에 ≪조선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북한에서 문단 활동을 재개했으며, ‘고전 문학 편찬 위원회’에 소속되어 고전 문학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주도하면서 이용악과 함께 악시가(樂詩歌) ≪풍요선집≫ 등을 간행했다. 다시 10여 년간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1973년 ≪조선문학≫에 두 편의 시를 발표한 뒤에는 고전 번역 사업에만 종사하면서 후학 양성과 번역집 발간을 하던 끝에 1987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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