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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8952205804 / 781쪽 350 x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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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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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미래전략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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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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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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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해병대 - 투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정예집단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군인 또는 군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군발이’니 ‘군사문화의 잔재’니 하는 부정적?인 수식을 덧붙여 비하하기 십상인 경우가 많다. 굳이 부정적인 관점을 내놓지 않더라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그저 옆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존재처럼, 평상시 군인이나 군대에 대한 고마움을 피력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이는 아마도 전통적으로 무(武)를 경시해온 유교 사상의 영향과 두 차례의 쿠데타를... 해병대 - 투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정예집단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군인 또는 군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군발이’니 ‘군사문화의 잔재’니 하는 부정적인 수식을 덧붙여 비하하기 십상인 경우가 많다. 굳이 부정적인 관점을 내놓지 않더라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그저 옆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존재처럼, 평상시 군인이나 군대에 대한 고마움을 피력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이는 아마도 전통적으로 무(武)를 경시해온 유교 사상의 영향과 두 차례의 쿠데타를 비롯하여 30년이 넘게 계속된 정치군인들의 권위주의적 통치, 그리고 그에 따른 군사문화 팽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전 세계적인 냉전 해소와 남북한 관계개선 노력에 따른 평화 정착에의 기대 심리도 결과적으로 군사 부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종교 등과 마찬가지로 군사(軍事) 또한 수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인류 역사의 일부이자 때로는 다른 문화보다 훨씬 소중하고 절박한 자산이다. 무엇보다도 한민족은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숱한 전쟁을 치러왔고 해방된 후에는 신성한 민족의 이름을 모독하면서 전 국토를 전제 독재체제의 지배 아래에 놓으려는 북한 공산정권의 침략전쟁과 국지도발, 납치, 테러까지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처해있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서 당장이라도 위기 사태가 터지면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국군 장병들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의무, 명예, 그리고 국가’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헌신으로 국토방위의 임무에 충실해왔다. 이들의 존재와 긍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며, 반드시 국민 모두가 그 중요성과 고마움을 가슴 깊이 새겨야만 할 것이다. 대한민국 해병대를 흔히 ‘귀신 잡는 해병대’, ‘무적 해병’ ‘신화를 남긴 해병대’ 등으로 부른다. 해병대는 육?해?공군보다 훨씬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차지하는 위상은 실로 대단하다. 세계의 어느 나라 군에서든지 해병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수 정예’와 ‘선봉부대’의 대명사다. 대한민국 해병대도 지난 1949년 창설 이래로 반세기가 넘는 역사 속에서 빛나는 무용(武勇)을 떨쳐 군사 분야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해병대는 ‘투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정예집단’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해병대는 해병대 출신의 장병들뿐만 아니라 국군 전체, 아니 한국의 국가적인 자랑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병대 창설의 배경과 과정 1945년 해방에서 1948년 건국까지 소위 ‘해방공간’ 3년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격변과 혼란이 반복된 시기였다. 공산세력의 발호와 선동은 일반 대중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1946년 9월 23일 서울 철도 공작창 등 전국 각지의 철도 노동조합원들이 가담한 9월 총파업 사건, 10월 1일 대구 폭동,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유혈사태 등은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공산주의 세력은 창군 과정의 혼란기를 틈타 군 내부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는데, 그것은 공식 군사조직인 국방경비대의 충원과정에서 입대자에 관한 신원조회 실시를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는 “어떠한 정치이념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미군정의 모병 원칙에 따른 것이었는데, 그 결과 공산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존재를 숨긴 채 창설과정에서부터 국군 내부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공산주의 추종세력의 잠입은 곧 국군에게 큰 위협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의 여순 반란 사건, 11월 2일부터 1949년 1월 30일 사이에 대구에서 3차례 반란 시도, 1949년 5월에는 춘천에 주둔한 제8연대 소속 제1, 제2 대대가 38선을 넘어 월북하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반란 사건으로 국군은 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 세력들을 색출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6.25 전쟁 직전까지 4차례의 숙군이 단행되었으며, 적발 대상자의 수는 1,327명이었다. 한국군에 해병대가 설치된 계기는 내부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결 과정에서 나왔다. 특히 1948년 10월 여수?순천에서의 제14 연대 반란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해군은 여수를 탈환하기 위해 육군의 진압작전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해안선이 길고 수많은 섬들이 분포하는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 때문에 상륙작전이 갖는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당시 해안 봉쇄 작전을 지휘했던 신현준 해군중령(뒷날 초대 사령관)은 “만일 해군이 육전대(해병대의 일본식 명칭)와 같이 상륙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전투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진압 작전 결과보고서를 제출했다. 곧바로 해군본부는 자체 상륙부대의 창설계획안을 작성했다. 제시된 방안은 두 가지였는데 ①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전투부대로 창설하자는 안과 ②해군기지의 방어를 담당하는 경비부대로 만들자는 안이 맞섰다. 결국 해군은 “1개 대대 이상의 병력과 장비를 갖추고 상륙, 기지 경비를 수행할 수 있는 해군 소속 보병부대”의 창설계획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커다란 장애에 부딪쳤다. 국군 참모총장인 채병덕 육군소장이 “육군과 같은 성격의 전투부대를 해군에 별도로 창설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서 계획안을 기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해군은 포기하지 않고 “해군 기지 방어를 주요임무로 하는 경비부대 창설”이라는 수정안을 제출했고, 일반 결재 서류들과 섞어 제출하여 결재를 받는데 성공했다. 난센스였다. 이렇게 출발한 해병대는 6.25 전쟁 중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며, 필요에 의하여 일반 육상전투에 종사할 수 있다.”로 개정되었다. 이로써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주요 임무로 하는 전투부대”라는 점이 명시된 것이다. 6.25 전쟁 중 치룬 몇 개의 전투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의 썰렁하기 그지없는 격납고에서 신현준 사령관을 위시하여 300명의 제1기 신병과 80명의 기간장병이 해병대 창설 기념식을 가졌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 어떤 시련도 흔연히 극복하고 장차 국방의 최강부대가 되도록 모든 장병이 일치단결하여 정진할 것”을 맹세했다. 해병대 창설 직후 대원들에게 지급된 장비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훈련용으로 지급된 무기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99식 단발소총과 나무총이었다. 이마저도 수량이 넉넉하지 못했으며, 1인당 5발씩만을 실탄사격훈련에 할당받았는데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심지어 격발되지 않는 불량도 많았다. 당시 기준으로 신식 병기였던 미국제 M1소총은 교육용으로 단 1정만을 보유한 상태였다. 대원들의 훈련복이나 철모, 모자, 군화 역시 제대로 지급된 것이 없었다. 지급받은 군화 가운데서 발의 크기가 맞지 않는 대원들은 아예 맨발로 훈련을 받았다. 오늘날 해병대가 자랑하는 고강도의 훈련, 인내심, 임전무퇴 정신의 전통은 바로 이 시기에 유래한 것이다. 통영상륙작전 창설된 지 겨우 1년여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오늘날까지도 ‘해병대’하면 자주 인용되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표어가 처음 등장한 전투가 통영상륙작전이다. 당시 종군 기자로 한국에서 활동했던 미국 AP통신의 마가렛 히킨스 기자가 통영에서의 상륙전을 보도하는 자신의 8월 17일자 기사에서 “그들은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라고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유래였다. ▶ 통영상륙작전의 일자별 전투기록
목차
추천사
피와 땀으로 점철된 해병대의 발자취 / 신현준(초대 사령관)
대한민국 해병대의 역사를 한눈에 / 김명환(제24대 사령관·전우회 총재)
해병대 1기생의 혼 / 홍우섭(1기생회 회장)
해병대의 미래는 밝다 / 송관영(부사관 1기)
서문 : 해병대, 그 독특한 역사 속으로
제1부 건국과 건군의 격랑 속에서 - 창설(1949. 4.~1950. 6.)
1. 상륙전 그리고 해병대
상륙전과 그 기원 | 해병대의 유래 | 한민족의 상륙전 전통
2. 혼란 속의 탄생
건국(建國)과 건군(建軍) | 공산세력의 교란 | 상륙전부대가 필요하다 | 초라한 출발
3. 초창기의 해병대
악조건과의 싸움 | 진주에서의 첫 임무 | 이번에는 제주도로
제2부 구국의 최전선에서 - 6·25전쟁 : 상(1950.6.~12.)
1. 악전고투(惡戰苦鬪)
다가오는 침략의 마수(魔手) | 군산에서의 첫 전투 | 후퇴는 이어지고 | 함양에서 진주로
2. 반격의 시작
고사리에서의 첫 승리 | 진동리-반격은 시작되었다 | 최초의 통영상륙작전 - '귀신 잡는 해병'의 탄생
3. 총반격의 선봉으로
인천상륙의 결정 과정 | 세기의 걸작-인천상륙작전 | 서울을 따라 동쪽으로 | 서울에 다시 휘날린 태극기 | 잔당 소탕
4. 깨어진 북진통일의 꿈
북진과 원산상륙 | 기약 없는 후퇴
제3부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 6·25전쟁 : 하/전후 정비(1951.1.~1964.)
1. 재반격에 나서다
안동, 영덕전투 | 영월전투-본격적인 재반격 | 홍천전투
2. 고지쟁탈전
화천 저수지를 탈환하라 | 도솔산에 새겨진 ‘무적해병’의 전설 | 김일성, 모택동고지를 향하여
3. 전쟁 후기의 작전들
서해 연안 도서확보전 | 동해안 봉쇄작전 | 수도권을 사수하라
4. 전후 결산과 성장
6·25와 해병대 | 전후 성장과 재편성 | 5·16과 해병대
제4부 청룡은 간다 - 베트남전쟁(1965.10.~1972.2.)
1. 건국 이래 최초의 해외참전
베트남전쟁의 유래 | 한국군도 베트남으로 | 청룡(靑龍)부대의 탄생
2. 첫 전장(戰場), 캄란
베트남에 첫발을 딛다 | 특수한 전장에서는 특수한 전술을 | 첫 승리-백경, 번개작전
3. 투이호아를 뒤흔든 청룡의 용트림
이동 배경 | 청룡1호작전의 성공 | 재건, 해풍작전 그리고 이인호
4. 추라이라는 이름의 지옥
북극성은 빛난다 | 짜빈동의 신화 | 전투는 계속되고 | 용머리, 용화작전-추라이 평정의 마무리
5. 마지막 전장, 호이안
청룡의 세 번째 이사 | 구정공세와 괴룡작전 | 호이안의 잔당 소탕작전 | 승룡작전-호이안을 호령하라 | 고노이, 베리아를 평정하라 | 피날레-황룡, 기룡작전 | “싸웠노라, 이겼노라, 돌아왔노라”
6. 전후 결산
그후의 베트남전쟁 | 베트남전쟁이 남긴 것
제5부 불사조는 죽지 않는다, 다시 태어날 뿐이다 - 시련과 부활, 발전기(1973.10.~현재)
1. 날개 꺾인 불사조
해체와 통폐합 | 암흑기의 시작
2. 대간첩작전에서의 활약상
북한의 비정규전을 이용한 대남 도발 | 1960년대 | 1970년대 | 1980년대
3. 돌아온 불사조
재창설로 기사회생한 해병대 | 제2창군 시대
4. 해병대의 비전
해병대의 현주소 | 향후 과제
제6부 해병대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해병대의 특수성과 문화
1. 해병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빨간 명찰'을 향한 6주의 지옥훈련 | 무엇이 그들을 해병대로 이끄는가
2.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단결력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 해병혼(魂) - 해병대 정신의 결정판
3. 해병대의 주요 상징들
해병대 상징 | 팔각모 | 빨간 명찰
4. 막강조직-해병대전우회
해병대전우회의 창립 | 주요 활약상
부록
역대 주요 직위자 명단
전쟁기념관 선정 해병 출신 호국인물
주요 전적 기념물
전사자 명단
연표
해병대전우회 주소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