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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0449160 / 238쪽 153 x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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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앤루니스 리뷰
철과 말을 다루는 기술을 원동력으로 세계의 질서를 한 때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패권 의지를 갖고, 인류 문명사의 한 장을 장식한 히타이트의 역사와 문화를 일반 독자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학술적인 역사적 설명보다는 히타이트 역사의 전체적 흐름을 알 수 있도록 개괄적인 체제로 기술하고 있다. 히타이트 역사는 소중하게 간직했던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맛보는 재미가 있다.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히타이트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 히타이트는 기원전 1200년경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북방 해상 민족에 의해 약탈되고 폐허가 되었다. 그 이후로 아무도 히타이트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히타이트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패망 후 700년이 흘렀을 무렵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히타이트 부조물을 이집트 세소스트리스 3세의 것이라 여기고 만다. 그 후 간헐적으로 히타이트 문자가 발견되었으나 잊혀진 히타이트를 기억해주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1872년 ... ▶히타이트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 히타이트는 기원전 1200년경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북방 해상 민족에 의해 약탈되고 폐허가 되었다. 그 이후로 아무도 히타이트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히타이트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패망 후 700년이 흘렀을 무렵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히타이트 부조물을 이집트 세소스트리스 3세의 것이라 여기고 만다. 그 후 간헐적으로 히타이트 문자가 발견되었으나 잊혀진 히타이트를 기억해주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1872년 시리아에서 알 수 없는 문자와 그림으로 된 기념비가 주목을 받은 뒤, 아나톨리아에서도 같은 문자가 발견되면서 역사가들의 호기심에 불이 붙게 되었다. 분명 시리아에서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어떤 왕조가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점토판의 해독 역사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의문의 문자는 아시리아 전공 학자인 독일의 흐로즈니에 의해 처음으로 해독되었다. 흐로즈니를 히타이트어 해독의 아버지로 불리게 한 문장은 “당신은 빵을 먹을 것이며, 물을 마실 것이다”였다. 점토판 속의 ‘ezza’는 영어의 ‘eat’, 라틴어의 ‘edo’, 독일 고어인 ‘ezza’를 통하여 ‘먹다’로 해석되었고, ‘vadar’는 영어의 ‘water’, 독일어의 ‘wasser’와 유사하다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흐로즈니의 연구는 히타이트인들이 최초의 인도 유럽·어족이었음을 밝혀내는 증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점토판 속에 숨겨진 히타이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데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왕실 내 유혈 권력 투쟁과 텔리피누 칙령 아나톨리아의 소공국을 아우르고 왕국을 세운 히타이트는 항시 시리아와 바빌론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한편, 소공국들에 대한 견제를 늦출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히타이트의 첫 번째 왕인 하투실리 1세부터 텔리피누 왕 즉위까지 65년의 세월 동안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는 왕위 찬탈극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모든 자연물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는 텔리피누 신의 이름을 지닌 텔리피누가 왕이 되면서 개혁을 결심하고 ‘판구’라 불리는 귀족 회의를 통해 ‘텔리피누 칙령’을 발표하였다. 텔리피누 칙령은 왕위 승계의 순서를 엄격한 기준에 따를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 법은 히타이트 제국의 종말 때까지 시행되었다. 텔리피누의 법 정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유혈극은 또 다른 복수를 낳게 하므로 연좌제를 폐지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막도록 한 것이다. 텔리피누가 법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참으로 현대적인 법의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학자들은 텔리피누에게 시대의 휴머니스트라는 과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집트와 대등하게 맺은 세계 최초의 평화 조약 히타이트는 무와탈리(기원전 1290~1272년)에 이르러 이집트의 시리아에 대한 정복욕을 차단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의 군대와 카데쉬에서 전투를 벌인다(기원전 1275년). 아무리 이집트가 이 전쟁의 승리자는 람세스라고 강조하더라도 결과는 무승부였다. 그래도 승자를 고르라면 그 승자는 무와탈리였다. 이집트의 람세스 군대가 전쟁 후 모두 카데쉬에서 철수하였지만 히타이트 군대는 시리아 중앙까지 진군하여 이 지역을 약탈하였고, 히타이트와 이집트 간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아무르 왕국이 히타이트 편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이 전쟁 이후 두 강대국 간 평화 조약이 체결된 점 등 때문이다. 이 평화 조약은 세계 최초의 평화 협정으로 히타이트의 국제 관계를 엿볼 수 있으며, 또한 히타이트가 이집트와 대등한 세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천의 신을 가진 나라 히타이트는 숭배하는 신이 너무 많아 천의 신을 가진 제국으로 불린다. 이는 히타이트에서 종교의 비중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며, 외부에 대하여 언제나 열려 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그 누구의 신이든지 히타이트에서는 존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히타이트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배척하지 않았다. 히타이트는 하티 나라의 땅에 들어와 하티인들이 남긴 문화와 영향을 크게 받고 살았으며, 하티의 문화를 계승하는 관용과 여유를 보였다. 히타이트인들의 점토판 보관법도 애초에 수메르의 방법을 계승한 것이다. 히타이트인들은 남의 것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창조, 재융합 능력이 탁월하였다. ▶탈리오 법칙에서 벗어난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법 히타이트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이 적용되는 보복의 원칙에 두지 않았다. 히타이트의 법은 보다 인간적이고 온건한 것이었다. 피해자에게 금전으로 보상을 해주도록 함으로써 과거의 보복 원칙을 탈피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였으며 또한 연좌제를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근대적이었다는 데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법조문은 도둑질, 살인, 결혼, 성(性) 등에 관한 것으로 고정된 법규가 아니라 세월이 지남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개정되는 유연함을 지녔다. ▶히타이트의 발굴은 고고학계의 최대의 쟁점이 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단지 철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민족으로만 알려져 있는 히타이트를 점토판과 함께 그 역사를 살펴가는 과정은 일반 독자들에게 지식 탐구의 흥미로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며, 또한 인류 문명의 발자취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히타이트를 큰 틀 안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목차
제1부 히타이트 입문
. 2003년 5월에 부활한 히타이트 제국
. 히타이트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
. 히타이트 언어의 해독 '당신은 빵을 먹고 물을 마실 것이다'
. 히타이트인들의 정신적 고향 '하티 나라의 땅'
. 히타이트인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였을까
. 히타이트 역사를 밝혀주는 자료는 무엇인가
제2부 히타이트 역사
. 히타이트 시대의 전 . 후 역사
. 히타이트인들의 시조, 쿠사라 왕조 가문
. 초기 왕국 시대 '시리아와 바빌론을 향해'
. 유혈극을 부른 왕실 내 권력 투쟁
. 법과 질서를 사랑한 텔리파누
. 히타이트 제국 시대를 열다
. 또 하나의 시련 '전염병이 제국을 휩쓸다'
. 이집트와의 대전쟁과 평화
. 제국의 쇠퇴와 멸망
. 인물로 읽는 히타이트 역사 요약
제3부 히타이트 자세히 들여다보기
행정조직 / 종교 / 점복과 주술 / 신화 및 설화 / 법령 / 경제 생활 / 예술 / 군사 / 카데쉬 전투 / 히타이트의 갑작스런 멸망
제4부 히타이트 역사가 남아 있는 주요 명소
보아즈칼레(하투샤) / 야즐르카야 /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 알라자회윅 / 퀼테페


































